길 가던 정신지체 15세 소녀를 성폭행한 50대 남자를 판사는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성폭행한 뒤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소녀를 집 앞에 데려다주었다는 이유에서다. 성폭행 흔적을 없애기 위해 씻기고, 다음에 또 성폭행하기 위해 집을 알아뒀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은 못했던 모양이다.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 잠자던 노부부를 찔러 남편을 죽게 한 피고인은 만취상태였다는 이유로 형을 감경해줬다. 여자친구를 무자비하게 폭행한 피고인은 의대생이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했다. 창경궁을 방화한 69세 노인은 집행유예로 풀려나 국보 1호 숭례문에 또 불을 질렀다. 그가 궁에 불을 지른 죗값을 제대로 치렀더라면 숭례문은 잃지 않았을 수 있다.
법관들이 즐겨 쓰는 ‘사회통념에 비추어’는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을 말한다. 한데 일반인의 상식과 동떨어지거나 괴리가 큰 판결이 허다하다. 양심과 선입견, 자비와 엄벌이 엿장수 가위질처럼 제각각이다. 그래도 시민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고작 청와대 국민청원란에 분노의 글을 올리거나 담벼락에 침을 뱉거나 하늘에 주먹질을 할 뿐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9월4일 (출처:경향싱문DB)
민주주의는 입법·행정·사법부의 삼권으로 나누어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운영되는 체제다. 입법부를 이루는 국회의원과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은 주권자인 시민이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한다. 이들의 잘못은 다음 선거에서 투표로 심판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판사는 시민이 선출하지도 않고 심판할 방법도 없다. 시민의 의사를 사법부에 관철시킬 도구도 없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데 우리나라 시민은 입법·행정권만 행사하는 3분의 2쪽짜리 주권을 갖고 있다.
미국의 판사는 선거를 통해 뽑는다. 현재 39개 주가 선거로 판사를 뽑고 있다. 전국의 주판사 87%가 선거로 임용됐다는 통계가 있다. 판사를 선거로 뽑지 않는 주는 주지사가 지명하고 의회의 인준을 받는다. 판사도 시민의 통제 안에 두겠다는 국민주권주의에 따른 것이다. 주권자의 선택을 받지 않은 판사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민주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이렇게 시민이 사법권을 통제하고 있음에도 판사들을 이중으로 견제하기 위해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유무죄는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결정한다. 배심원으로 참여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일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법은 상식이기 때문에 모든 시민이 훌륭한 법률가가 될 수 있다. 법은 법전 속에 잠들어 있지 않고 사회상규를 벗어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판사는 단 한 번의 시험, 사법시험 합격으로 평생 사법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대학 1, 2학년 때부터 고시 공부를 시작하고, 고시에 합격하면 신분이 급상승한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주류집단에 편입한 뒤 폐쇄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특별한 지위를 누린다. 판사들은 남을 심판만 하지, 심판은 받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직업이 없다. 1950년 고시제가 실시된 이래 선민의식, 엘리트주의, 관료화, 귀족화는 변한 게 없다. 법률지식의 독점으로 권력을 확보하고, ‘너희들이 법을 알아’라는 식으로 시민 위에 군림한다. 과거 군사독재 시대 저질러진 국가폭력은 종국적으로 법원의 판결로 뒷받침되었다. 조봉암 사건, 인혁당 사건, 재일동포 유학생·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 아람회, 오송회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이들 사건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재심에서 무죄로 뒤집어졌다. 당시 사법부는 정치권력에 굴종해 사법살인까지 저질렀지만, 그때 그 판사들 누구도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하지 않았다. 되레 민주화 이후에도 ‘양승태 사법부’는 법과 양심을 버리고 권력과 거래를 자청했다. 사법농단과 관련한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일반 국민들은 내 사건은 대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임”이라고 쓰여 있었다. “상고법원 논리는 이성적인 법조인들에게나 통할 수 있다”고 했다. 법조인은 이성적이고, 국민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김명수 사법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된 압수수색영장은 208건 중 185건이 기각됐다. 기각률 90%다. 일반 범죄수사의 압수수색영장 기각률은 15~20%다. 시민들은 이런 사법부를 무력하게 지켜만 볼 수밖에 없다.
이제 보니 사법부 독립이란 주장은 방어벽이었다. 독립이란 명분 아래 철저히 외벽을 치고 모든 견제와 감시를 피해왔다. 공정하지도 않으면서 독립을 내세워 시민을 속여왔다. 법관의 독립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어야지, 시민으로부터의 독립이 될 수 없다. 사법개혁은 이 위험한 권력을 견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 그 얘기를 할 때가 됐다.
※칼럼은 김웅 <검사내전>, 최재천 <위험한 권력>을 참고하고 일부 인용하였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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