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검찰 마음대로다. 수사권, 수사지휘권, 독점적 영장 청구권,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누구든 잡아넣을 수 있고, 언제든 풀어줄 수 있다. 검찰의 힘은 검찰 출신 변호사와 국회의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검찰의 힘이 세야 전관예우도 받고 위세도 떨칠 수 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오염은 끔찍했다. 그랜저 검사, 벤츠 여검사, 다단계 사기범으로부터 돈 받은 부장검사, 대학동창에게 공짜 주식을 받은 검사장….
김학의·장자연 사건은 영화 같은 얘기다. 기득권 세력의 성(城)은 영화보다 훨씬 공고하다. 재벌·정치인·판검사, 언론권력은 그들만의 성채를 쌓아놓고 그 안에서 ‘언터처블 맨(untouchable man)’으로 군림했다. 이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술판에 몰려다니고 돈을 받고 집단 강간을 하는 동안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았다. 호루라기를 분 사람은 되레 매장됐다. 이들의 위선과 음모, 공생과 협잡의 권력은 계속됐다. 그들은 담쟁이덩굴처럼 서로 휘감겨 있었고, 흔들리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에서 법무부 박상기, 행정안전부 김부겸 장관으로부터 ‘버닝썬’과 경찰 유착 의혹,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별장 성접대 의혹’ 및 고(故) 장자연씨 사건의 보고를 받고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있었다면 이들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수처는 검사, 판사, 국회의원, 장군, 경무관 이상 경찰 등 5500여명의 비리를 수사하는 기구다. 살아 있는 권력을 성역 없이 수사하자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을 쪼개는 검찰개혁의 핵심이기도 하다. 죄지은 자는 두려울 것이고, 죄 없는 사람은 걱정할 까닭이 없다. 모두가 찬성이다. 이제는 검찰도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딱 한 군데 반대하는 곳이 있다. 자유한국당이다. 황교안 대표는 “공수처가 들어서면 애국우파 말살의 친위부대가 될 것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수처에 잡혀갈 것”이라고 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공수처는 대통령 직속 기관을 하나 더 만들어 비판 세력을 완전히 짓누르겠다는 것으로, 대한민국판 게슈타포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것이다.
한국당은 공수처장을 국회에서 지명해 달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황교안·나경원 체제에서 공수처, 검경수사권 조정에 동의할 가능성은 제로다. 한국당 관계자는 “우리는 우왕좌왕 없이 친검찰로 가기로 했다. 공수처든, 검경수사권이든 합의 안 해주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된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지난 20년간 공수처법안은 발의됐다 폐기되기를 반복해 왔다. 시민 83%가 공수처 신설에 찬성하고 있다. 그런데 시민의 대표라는 의원들은 시민의 입법요구를 무시하고 있다. 시민을 대표하는 기능은 한국당에선 작동되지 않고 있다.
공수처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경찰이 경찰의 유착 수사를 맡고, 검찰이 검찰의 봐주기를 수사하는 이상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직의 명운을 걸고 수사한다지만, 검경은 이런 위기를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다. 간첩 누명을 쓴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가 누명을 벗기까지는 12년이 걸렸다. 에밀 졸라는 “진실은 지하에 묻히지 않는다. 진실은 스스로 자라나고, 무서운 폭발력을 지닌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수십 번, 수백 번 진실을 호소하고 증거를 갖다 줬지만 검경은 이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진실을 파헤치기는커녕 죄인 취급했다. 진실은 자라고 전진하고 폭발한다. 김학의·장자연 사건 진실의 전진은 10년째 계속되고 있고, 이제 폭발을 목전에 두고 있다.
기득권 세력은 그 전의 ‘독재 대 민주’ 프레임을 ‘보수 대 진보’ 프레임으로 대체시켰다. 보수는 반북이고 체제수호세력이며 진보는 친북이고 반국가로 정의하는 식이다. 툭하면 나오는 색깔론은 의도가 분명하다.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으로는 승산이 없지만 빨갱이 담론으로는 반대세력을 무력화하는 데 백전백승 언제든 잘 먹혀들기 때문이다. 민주·평화·복지는 보수가 말하면 시대정신이고 새로운 세력이 말하면 위험한 포퓰리즘으로 변한다. 공수처는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이제는 정치권력·자본권력·검찰권력·언론권력의 생얼굴을 드러내고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상식이 비상식을 물리치고, 공정이 불공정을 이기고, 정의가 부정을 압도해야 한다. 약자의 외로운 싸움을 더 이상 외롭게 하지 않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최소한의 조치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권력도 세상이 응시하는 광장에선 활개를 치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항상 시민들이었다. 그래서 진실과 정의를 지키는 데에는 시민의 각성과 노고가 필요하다. 나폴레옹은 ‘검찰은 국가의 눈’이라고 했다. 그 눈은 곪을 대로 곪았다. 공수처는 시민의 눈이 될 것이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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