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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치 9단은 필요 없다

 

바둑의 단위(段位)는 초단부터 9단까지 있다. 바둑을 좋아하고 즐겼던 양나라의 무제가 고수들의 실력에 순위를 매기도록 한 게 기원이다. 신하들은 당시 기사 270명의 기보를 뒤져 역량에 따라 9단계로 분류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가장 높은 9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입신(入神)’이라고 했다. 


정치에도 입신이 있는 모양이다. ‘정치 9단’이란 원래 일본에서 정경유착형의 노회한 정객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국내 정치에 처음 쓴 이는 민정당 박희태 대변인이었다. 그는 1989년 5공 청산 문제를 풀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야 3당 총재가 회동을 앞두고 있을 때 “대통령과 세 분 총재는 모두 정치 9단으로서 입신의 경지에 있는 만큼…”이란 논평을 내놓았다. 정치에 단수를 매긴다는 게 어불성설이니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 정치사에서 ‘정치 9단’은 대체로 양김(兩金)에게 붙이는 수식어였다. JP(김종필)까지 포함하면 3김 정도다. 격동의 한국 정치사에서 세 정치 고수들의 현란한 행마를 보면 그런 칭호를 들을 만하다. 3김은 정치공학에 능했지만, 보스 정치와 금권 정치 같은 폐단도 적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정치 지형은 3김의 과두체제가 만들어 놓은 지역주의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그늘이 넓고도 크다. 


서로 악수를 나누는 야권의 3김 총재들 (경향신문DB)



올봄 총선은 3김의 영향력이 배제된 첫 선거였다. 여기서 민주통합당은 참패했다. 당시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박선숙은 패인을 사람에서 찾았다. 



“민주통합당이 지난 총선에서 패배한 이유는 정치를 새롭게 할 새로운 사람들을 전면에 포진시키는 데 실패했고 정책 면에서도 오락가락했기 때문이다. 1997년 DJ(김대중)는 대선을 앞두고 정동영·추미애·천정배·정세균·신기남 같은 당시 3040세대를 대거 영입했다. 한편으로는 중도와 안정감을 주는 인사들을 포진했다. 집권의 플랜은 구체적으로 사람과 정책으로 나타나야 한다. 대선을 불과 8개월 앞둔 총선을 이렇게 안이하게 치를 수 있었나 반성해야 한다.”



맞는 얘기다. 민주당은 누가 보더라도 절대 유리한 상황에서 제1당의 자리를 내줬다. 민주당은 지지자들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했다. 그러므로 통렬히 반성해야 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여전히 반MB, 반새누리당 정서에 기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다. 고작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정치 쇼” 운운하며 시비를 거는 게 전부다. 스토커식 비판만으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다. 참기름 장수도 그렇게는 안 한다. 과연 이런 당이 집권 10년의 경험을 갖고 있는 정당인지 의아할 정도다. 


정치를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수읽기로 하는 시대는 지났다. 문성근은 “최고위원회의에 가면 다른 분들은 아무리 낮아도 정치 6단 이상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무급’이다. 어느 순간 내가 수 경쟁을 하면 안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무급’이 최고위원 2위로 선출되는 시대다. 놀랄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초보가 더 무섭다. 박원순·안철수도 정치적으로 무급에 가까운 아마추어들이다. 


민주당은 총선 참패 이후 쇄신을 내세우며 지난 6월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했다.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프로 정치인이다. 언필칭 정치 9단의 반열에도 오르내리고 있다. 한데도 새 체제가 출범한 이후 당 지지도는 창당 이후 처음으로 20%대로 추락했다. 수익을 내기는커녕 본전마저 까먹고 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저축은행이네, 돈 공천이네, 무슨 비리 의혹만 터지면 이름 석자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야당을 향한 표적수사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개운치는 않다.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가 대검 청사를 나서고 있다. (경향신문DB)



민주당은 국민들이 정당 근처엔 가본 적도 없는 장외 인사에게 눈길을 돌리는 까닭을 아는지 궁금하다. 기존 구태 정치인에게 진저리를 치고, 이 놈의 집구석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뜻이다. 야당이 표류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새로운 대안에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대선을 4개월 앞두고 바깥인사와의 단일화를 목표로 ‘준결승 후보’를 뽑는 제1야당은 이제껏 없었다. 자칭 60년 역사의 정통 야당 계승자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정치에 9단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필요도 없다. 몇 사람이 주물럭거렸던 정치를 이제 누구나 감시하고 논평하고 개입하는 세상이 됐다. 꼼수도 먹히지 않는다. 경제민주화니 국민통합이니 듣기 좋은 얘기는 다 할 수 있지만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울림은 달라진다. 시장에서 배추 고르듯 진정성을 요리조리 따져 보는 시대다. 모바일 문제 때문에 경선 초반에 파행이 빚어진 것도 흥행을 노린 얄팍한 정치공학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본시 여당은 세상 바뀌는 변화에 둔감하고, 야당은 발 빠르게 민심을 대변하는 법이다. 지금 형국은 그 반대다. 제1야당의 맹성과 분발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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