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
‘김기춘 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
경기 안성의 금수원 대치 현장에 내걸린 플래카드다. 구원파 신도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 중인 정문 한가운데 걸려 있다. 통상 이런 경우엔 수사의 총책임자인 검찰총장이나 그보다 위인 대통령을 타깃으로 하기 십상이다. 한데 구원파는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을 콕 집어 내걸었다. 어제는 그 위에 ‘우리가 남이가’란 현수막이 새로 추가됐다. 역시 김기춘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구원파 대변인에게 물었다. 왜 김기춘인가.
“오대양 사건 때와 세월호 사고가 똑같은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부의 잘못을 덮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김기춘은 그때 법무장관이었고 지금은 비서실장이다. 김기춘이 기획하고 연출한 표적수사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금수원에서 구원파 교인들이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을 겨냥한 현수막을 건 채 정문을 지키고 있다. (출처 :경향DB)
그들의 의심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짚이는 대목은 있다. 세월호 사고는 출항→침몰→대피→구조→관리라는 여러 단계에 걸쳐 온갖 부조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일가의 탐욕은 그중 하나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횡령과 배임이다. 경제수사는 급할 것 없고, 한다 해도 조용히 진행하는 게 상례다. 그런데도 사고 1주일째부터 친여보수 신문과 방송은 유병언으로 뉴스를 도배질하기 시작했다. 갑옷에 헬멧을 쓴 경찰 수천명의 대오(隊伍)는 거악과의 전쟁 이미지를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난데없이 공권력과 구원파가 맞서는 국면으로 바뀐 것이다. 덕분에 우왕좌왕했던 정부에 대한 추궁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검찰을 움직이고, 언론을 조종하는 마스터플랜을 누가 짜는지 구원파는 꿰뚫어본 것이다.
대통령 담화는 ‘청와대의 자진 침몰’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대통령이 보여온 독선과 오만함이 24분간의 담화에 고스란히 농축돼 있다. 대통령은 불과 한 달 만에 24개 대책이란 것을 뚝딱 만들어 내놓았다. 정치권이나 그 분야 전문가들과 논의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초당적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1년8개월 동안 시시콜콜 조사한 뒤 종합보고서를 만들고 40개 넘는 대책을 정부에 권고했다. 미국 정부는 이 보고서에 기초해 사후 대책을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는 아직 진상조사위원회도 만들지 않았다. 진단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은 처방전을 던진 것이다. 해경 해체는 옛날 임금이 대역죄인이 나온 마을을 쓸어 없애는 것과 흡사하다. 중죄인에게 수백년 형을 물리겠다는 초법적 형벌도 제왕적 발상이다.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하는 어린이 성폭행범 형량을 높이는 것 하나도 꼬박 6개월 동안 8차례 공론화를 거쳐 만들었다. 그게 법치주의 국가의 형법 체계요, 법적 안정성이다.
엊그제 담화는 대국민담화가 아니라 백성에게 내리는 왕의 칙령(勅令)에 가깝다. 칙령이라 하더라도 백성을 품는 왕의 정리(情理)가 있다. 물속에 자식을 둔 부모를 생각했다면, 그 부모를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닷속에 들어가는 잠수사를 떠올렸다면 해경 해체는 잠시 미룰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해경을 때렸지만, 멍은 가족들의 가슴에 들었다.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내 말이 법이다”라는 식의 이런 군주적 발상을 고치라는 것이다. 국정 철학과 운영방식을 민주적으로 바꾸고, 대통령 심기 외에 민심은 안중에도 없는 참모들을 갈아치우라는 것이다. 국가적 애도 분위기를 틈타 공안검사 출신을 국가정보원 차장으로 보내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검사를 청와대로 불러들이고, 대선 캠프 출신 꼴통보수를 방통심의위원에 앉히면서 반듯한 나라를 얘기할 수는 없다. 쫓아낸 검찰총장을 욕보이기 위해 혼외아들을 찾는 데 반년 넘게 온 검찰력을 쏟아부으면서 ‘비정상의 정상화’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박근혜 정부는 검찰총장 아들만 찾아주느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여당에서조차 ‘왕실장’ 김기춘을 교체하는 게 인적 쇄신의 핵심이라고 요구하는 데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얼마 전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여권 고위 관계자가 한 얘기다.
“박 대통령은 18년간 은둔생활을 했다. 자기 뒤에는 항상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누가 자기를 치받으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가 정색하고 치받으면 그걸 견디지 못한다.”
대통령을 낭떠러지로 밀려는 게 아니다. 침몰하는 대통령을 구하려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배(ship)는 리더십(leadership)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좋은 배로 갈아타기를 바란다.
박래용 정치에디터 겸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