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용 칼럼

도둑들

박래용 2017. 11. 14. 09:51

 

2017년 11월 14일자 30면 게재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범죄는 살인과 절도다. 카인은 하나님이 동생의 제물만 받자 질투심에 동생 아벨을 죽였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다.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훔친 것은 최초의 절도다. 범죄는 범죄다. 누구도 살인과 절도를 오래된 관행이니 봐주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예 그런 말을 못하게 성문(成文)화한 게 법이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同害)보복의 원칙을 담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높이 2.25m 돌에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하여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라고 법전의 서문을 새겨 놓았다. 기원전 1700년의 일이다.

2012년 최동훈 감독의 영화 ‘도둑들 ’의 한국판 포스터.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광범위하게 진행된 법치 파괴는 살인·절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범죄다. 국기 문란에 헌정 질서를 유린한 국사범(國事犯)이다. 박근혜의 ‘문고리 3인방’은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매달 1억원씩 월급처럼 받았다. 이들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지난해 7월 잠시 중단했다가 두 달 뒤에 다시 2억원을 가져오게 해 직접 받았다. 전액 5만원권 현금이다. 국정원은 박근혜의 ATM(현금인출기)이었다. 이명박은 국정원을 사설흥신소로 전락시켰다. 군은 사병화했다. 청와대는 내 집이고, 대한민국은 내 나라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시절, 국회·국정원·금융감독원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신의 직장에 꽂아넣었다. 검찰 관계자는 “요즘엔 뇌물 몇 억원 주는 것보다 아들·딸 취업시켜주는 게 훨씬 효율적인 뇌물”이라고 했다. 강원랜드 평균 연봉은 7073만원이다. 그곳의 2013년 신입사원 합격자 518명 중 493명(95%)이 외부 청탁을 받은 별도관리대상자였다. 불합격자 중 200여명도 청탁이 있었으나 ‘빽’이 약해 떨어졌다. 한국전력공사·석유공사·석탄공사·지역난방공사·토지주택공사·도로공사·디자인진흥원·부산항만공사…. 지금까지 채용비리가 밝혀진 공공기관은 23곳, 금융기관은 14곳이다. 신입사원 채용은 겉으로만 공채였을 뿐, 실상은 반칙과 특권의 잔치판이었다. 최순실은 딸을 이화여대에 집어넣었고, 뒷문으로 들어간 그 딸은 “돈도 실력이야.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했다. 들러리를 선 취업준비생, 수험생들의 좌절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황장엽은 “북은 미쳤고, 남은 썩었다”고 했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 10월혁명은 귀족들의 부정부패에서 비롯됐다.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정부와 월남은 극에 달한 모럴 해저드 때문에 무너졌다. 영국의 재상 글래드스턴은 “부패는 국가를 몰락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고 건재해 있는 게 놀라울 정도다.

적폐가 대단한 게 아니다. 불공정, 불평등, 부정의가 적폐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적폐청산은 불공정한 특권구조를 없애자는 것이다. 촛불은 적폐청산을 요구했고, 촛불로 탄생한 새 정부는 적폐청산을 국정과제 1호로 삼았다. 당연하다. 정권이 바뀌지 않았으면 이런 진실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검찰은 그 수사를 진행 중이다.

수구 야당과 보수언론에선 썩고 곪은 상처를 도려내는 적폐수술을 정치보복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눈감고 넘어가자는 얘기다. 형사소송법 제195조는 “검사는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를 수사하여야 한다”고 명시해놓고 있다. 범죄혐의를 보고서도 눈을 감는다면 검사의 직무유기다. 문제는 적폐청산이 아니라 지금껏 적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반민특위가 친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려 하자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이들을 동요시켜서는 안된다”며 가로막았다. 친일 기득권 세력은 “반민특위가 민족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반격했다. 이명박은 “이러한 것(적폐청산)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반민특위의 비극은 되풀이되고 있다. 반민특위 해산으로 친일 민족반역세력은 일제 때부터 누려오던 기득권을 계속 유지했다. 수구세력이 적폐청산에 저항하는 것도 ‘지금, 이대로, 쭉’을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학습효과도 없다. 좀도둑은 감옥에 가지만 나라를 말아먹은 큰도둑은 되레 당당하다. 기원전 고대국가에서도 정의를 실현하자고 돌에 새겼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정의를 포기하자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죽게 된다고 했다.

<박래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