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들/아침을 열며

[아침을 열며] ‘김경한 검찰’의 역주행

박래용 2008. 6. 23. 10:20
한 달쯤 전이다. 촛불이 한창 타오르던 5월26일 월요일 새벽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차관 등 실·국장 전원을 비상소집했다. 연락은 새벽 6시 이뤄졌다. 난데없는 호출을 받은 간부들은 아침 7시30분 서울 세종로 출입국관리사무소(법무부 시내 분실)로 모였다.

긴장한 간부들에게 김 장관은 입을 열었다. “불법집회·시위 주동자, 극렬행위자, 선동·배후 조종자는 끝까지 검거해 엄정 처리하라.”
긴급회의는 1시간 동안 진행됐다. 법무장관의 새벽 간부 비상소집은 국가비상사태를 연상케 하는 일이다. 1~2시간만 기다리면 과천청사에서 정상적인 간부회의를 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새벽 호출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말할 것 없이 고도의 긴장감과 위기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다음날 검찰은 긴급 관계기관 공안대책회의를 열었다. 김 장관이 공안정국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보수언론에서 ‘차도로 뛰어든 촛불집회’ ‘반정부 폭력시위’란 보도를 쏟아내며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비분강개하던 때다. 장관은 아마 본능적으로 검찰이 나서야 할 때라고 읽었던 것 같다. 

김 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공안통이다.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이른바 ‘구 공안검사’다.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돌릴 때도 왼쪽 사람에게 갈 때는 “좌익 척결”, 오른쪽으로 돌 때는 “우익 보강”을 외치던 시절이다. 공안검사의 후각은 동물적이다. 상부의 의중을 빨리 읽고, 통치 장애 요인을 미리 제거하며, 여권이 구상하는 정치 흐름을 뒷받침한다면 베스트다. ‘기업 프렌들리’로 간다면 규제완화책을 내놓고 공기업 물갈이를 하겠다고 하면 대대적인 공기업 사정에 들어가는 식이다.

배후 헛다리 짚고 네티즌 수사

촛불 초기 보수언론에서 ‘광우병 괴담’ ‘배후설’ 등을 대서특필하며 여론몰이에 나섰을 때다. 즉각 김 장관은 배후를 찾는 데 검찰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배후는 허망하게 나왔다. 촛불시위에 시민들은 ‘내 돈으로 양초샀다. 배후는 양초공장’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나왔다. 일종의 자수다. 지금까지 검·경은 배후든 괴담이든 누구 한 명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촛불은 눈물이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은 친북·좌익·빨갱이로 구분하는 대결의 구도에 익숙한 ‘올드 마인드’로서는 눈물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참여민주주의의 실험이다. 대한민국에 좌우파만 있는 게 아니고 새롭게 규정해야 할 ‘촛불파’가 생성됐다는 것을 장관은 모르는 것 같다. 

백미는 조·중·동에 대한 네티즌들의 광고주 압박운동에 대해 수사하라는 김 장관의 특별지시다. 짐작은 간다. 광고 압박으로 보수언론이 느끼는 절박한 위기감은 상상 이상이다. 광고가 줄어들자 지면도 하루 8~16면을 줄여 만드는 판국이다. 그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지면에도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뭐하고 있나’(중앙일보 6월17일자 5면). 

김 장관의 네티즌 수사 특별지시는 이에 대한 답이다. 시대를 거꾸로 가는 검찰의 역주행은 실로 안타깝다. 노무현 정부때 확립한 검찰 독립이 이명박 정권으로 넘어오자마자 하루아침에 까먹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이미 ‘정치검찰’ ‘MB검찰’ ‘조·중·동 경호검찰’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마당이다. 

촛불에 대처하는 이명박 정부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허깨비를 잡으려고 허공에 주먹질·발길질을 하는 것 같다.

‘정치검찰 회귀’ 어두운 데자뷰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거대한 촛불물결을 보고 자책했다”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날 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에선 인터넷 통제방안을 만들겠다고 하고 다음날 법무장관은 네티즌을 잡겠다고 한다.
‘뼈저린 반성’의 후속 조치라고는 믿기 어려운 조직적인 반격이다. 수세에 몰릴 땐 엎드리고, 꼬투리가 잡히면 반격하는 옛 모습 그대로다. 추정컨대 경찰이나 방송통신위원회 같은 데서도 곧 뭔가가 나올 것이다. 보수언론은 모모 하는 협회와 단체를 동원해 대대적인 비방 프로파간다를 펼칠 것이다. 

1970~80년대식 ‘데자뷰 현상(旣視感·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 다음에 무엇을 할지 뻔히 보인다. 모두 과거 어느 시절에선가 본 행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디지털 국민을 상대하는 20세기 아날로그 정부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