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원수모독죄
‘닫힌 문틈으로 몰아쳐 오는/ 산 너머 언덕 너머 물결쳐 오는/ 소름끼치도록 군화발 소리 / 작은 꽃밭도 진달래꽃도 짓이겨서/ 흙 속에 짓이겨져서….’
1977년 광주 중앙여고 국어교사인 양성우는 장편시 ‘노예수첩’에서 당시 유신독재체제를 살아가는 시민들을 노예에 빗대 박정희 정부를 비판했다. 이 시는 같은 해 6월 일본 시사잡지 ‘세카이(世界)’에 실렸다. 정권은 국가모독죄와 긴급조치 위반으로 그를 구속기소했고, 법원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형법에 ‘국가원수모독죄’는 따로 없다. 정확한 명칭은 ‘국가모독죄’다. 1975년 ‘내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이나 헌법에 따라 설치된 국가기관을 비방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7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 법 조항은 민주화 이후 1988년 폐지됐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수석대변인’이라고 표현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반발하며 국회의장석으로 올라가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 모독 발언은 공수만 바뀌었을 뿐 역대 정권마다 반복돼 왔다. 김대중 정부 시절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은 “대통령 입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모욕죄로 기소돼 유죄 판결(벌금 100만원)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등신 외교’ ‘놈현스럽다’, 이명박 정부에선 ‘쥐박이’ ‘2MB’란 말이 논란이 됐다. 박근혜 정부에선 당시 민주당 의원이 아침 회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을 언급하며 “박근혜 대통령도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했다. 발끈한 새누리당이 의원직 제명안을 제출하자 민주당은 “야당 의원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독재적 발상”이라고 받아쳤다.
정치권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을 놓고 시끄럽다. 여당은 국회 윤리위에 제소했다. 나 원내대표의 연설은 도가 지나쳤다. ‘일베 방장 수준’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 연설에 대한 평가는 시민들의 몫으로 맡겨도 된다. 그렇지 않고 칼부터 뽑아든 여당을 보는 것도 불편하다. 양성우 시인은 자신에게 적용된 국가모독죄에 대해 위헌심판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2015년 재판관 9명 만장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민주국가라면 누구든지 국가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설령 그 정도가 심해도 국가는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 국가원수도 마찬가지다.
<박래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