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봉준호 마케팅’

박래용 2020. 2. 13. 10:31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 경기에서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딴 뒤 한 여성 정치인이 축하 현장에 깜짝 등장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윤 선수와 나란히 찍은 사진도 올렸다. 그에겐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윤 선수의 메달을 이용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베트남 축구에 ‘박항서 매직’이 불자 한 야당 대표는 “우리 당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장면”이라고 해 실소를 자아냈다. 김대중 정부에서 벤처 광풍이 불었을 때, 벤처 활성화 대책을 “내가 만들었다”는 사람만 수십 명이었다. 거품이 꺼지고 투자자들이 쪽박을 차자 ‘내 탓’이라고 고백한 이는 없었다.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환호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P연합뉴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기는 정치인들의 특기다. 표가 되고, 얼굴을 알릴 수 있다면 좋은 일, 궂은 일을 가리지 않는다. 세월호, 천안함 사건, KAL기 괌 추락 때도 이들은 참사 현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들에겐 ‘정치 바바리맨’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석권하자 정치권이 이를 활용한 ‘봉준호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자유한국당 대구 지역 의원과 총선 예비후보들은 앞다퉈 ‘영화박물관’ ‘봉준호 기념관 건립’ ‘봉준호 동상’ ‘생가 복원’ 등을 쏟아냈다. 봉 감독은 대구에서 태어나 남도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 서울로 이사했다.

 

봉 감독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강성 좌파 성향’이란 이유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가 만든 <살인의 추억>은 “공무원·경찰을 부패 무능한 집단으로 묘사해 부정적인 인식을 주입하는 영화”, <괴물>은 “반미 정서와 정부의 무능을 부각해 국민의식을 좌경화한 영화”, <설국열차>는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운동을 부추기는 영화”로 평가됐다. <기생충>의 숨은 주역으로 꼽히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려 2013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부터 퇴진을 강요받았다. 그때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한국당 의원은 이제 와서 “봉 감독은 대구의 자랑이자 한국의 자랑”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염치도 없다. ‘정치판의 기생충’이 따로 없다.

 

<박래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