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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민주화의 길

박래용 2009. 10. 27. 10:33
자폐증 등 뇌기능 장애를 가진 환자가 특정 분야에서 비상한 능력을 갖는 경우가 있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등장하는 이레네오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져 뇌를 다친 뒤 포도나무에 달린 모든 잎사귀와 가지, 포도알의 수를 기억하게 된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인 킴픽은 일반인이 3분에 읽을 양을 단 6초 만에 읽고 기억했다고 한다. 

뇌는 기억한 정보를 일시적으로 해마(hippo campus)라는 장소에 보존한다. 보존 기간은 약 3주일이고 그 기간이 지나면 해마에서 정보가 없어진다. 그러나 해마에 정보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정보를 꺼내어 확인하면 기억은 강화되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기억을 강화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나중에 다시 그 기억을 사용해야 할 때 회상력이 높아진다는 게 뇌의학자들의 얘기다.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나빠진다고 하지만 뇌 구조에 맞춘 ‘3단계 뇌 단련법’을 따르면 건망증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크게 파악할 것, 둘째는 순서를 밟아가면서 기억할 것, 셋째는 몇 번 실패하더라도 떠올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기념일을 만들고 동상을 세우고 유적지를 닦아 선대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려 하는 것도 실은 쉽게 과거를 까먹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3·1절, 4·19, 6·25, 8·15 등 정부가 제정·주관하는 공식 기념일만 33개가 있다. 기념일이나 기념물은 체험세대와 후속세대와의 대화를 위한 촉매이자 기억의 영속화를 위한 장치이다.

서울대가 이 학교 출신 민주 열사들을 기리는 ‘민주화의 길’을 캠퍼스 내에 조성해 다음달 개통할 것이란 보도다. 1.2㎞ 길에는 4·19 혁명부터 유신, 1987년 6월 항쟁까지 30여년 동안 민주화운동에 몸을 바친 학생 18명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박종철이 누구예요?”라고 묻는 요즘 학생들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진 교수들이 길 조성에 나섰다는 전언이다. 

현대사 고비마다 질식할 것만 같았던 압제의 사슬이 저절로 풀렸던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의 공기, 민주화의 햇살은 20대 초반 꽃다운 청춘을 바친 이들의 혼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치열했던 민주화 과정의 통사(痛史)와 혈사(血史)를 기억하고 전하는 것은 후대의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