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들/경향의 눈
[경향의 눈] 한명숙 수사, 그 시작과 끝
박래용
2009. 12. 21. 10:38
판사들 사이에 ‘시골에서 집행유예는 무죄’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당사자가 “내가 죄가 있었으면 감옥 보냈지, 이렇게 풀어줬겠느냐”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다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디 판결문 좀 보자고 덤벼들 사람은 없을 터이니, 사방팔방 “나는 무죄났소”라며 돌아다니는 작자를 보면 진짜 죄가 없긴 없었던 모양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검찰은 정반대다. 누구든 검찰청 현관 포토라인에 섰다 하면 그때부터는 죄인이 된다. 혐의가 있고 없고, 무죄든 유죄든 그것은 나중의 문제다. “아무려면 검찰이 죄도 없는데 불렀겠느냐”는 게 보통사람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한명숙 전 총리의 검찰 수사가 그렇다. 한 전 총리 쪽에선 “1원도 안 받았다”고 하고, 검찰은 “입증에 자신 있다”고 하니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를 노릇이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나 이미 그는 절반은 죄인이 되었다.
전담 부서·시점 등 석연치 않아
검찰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시작부터 끝까지 그림이 얼추 그려진다. 주목할 부분은 네 가지다. 첫 번째는 검찰이 대한통운의 횡령을 밝혀내고자 수사한 게 아니라 특정 정치인들을 잡기 위해 횡령을 걸어 대한통운 전 사장 곽영욱의 신병을 먼저 확보했다는 점이다.
검찰이 곽영욱을 구속했던 게 지난 11월6일. 회사 자금 31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시켰다. 그리고 그 입에서 정치인 이름이 나오고 있다. 검찰 입장에선 첩보·인지 수사이겠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표적수사다. 전국 검찰의 특수수사를 총지휘하는 대검 중수부장 캐비닛엔 이런 비(秘)파일이 한가득이다. 언제, 누구의 파일을 뽑을지는 검찰의 선택이다. 잘 뽑으면 국민의 검찰이요, 권력의 입맛에 맞추면 정치검찰이 된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모습이다. 바로 ‘박연차 게이트’ 수사다. 검찰은 박연차를 탈세로 구속시킨 뒤 한달간 어르고 겁박해 리스트를 완성했다. 그를 압박하기 위해 검찰은 세 딸과 사위들에 대한 수사를 병행했고 딸들의 비명에 박연차는 두 손을 들었다.
곽영욱은 전주고 출신으로 참여정부와 민주당 쪽 인사들과 교분이 있는 인물로 분류돼 있다. 필시 그에게서도 제2, 제3의 이름들이 나올 것이다. 곽영욱을 쥐어짜는 수사기법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전형적인 ‘먼지떨이식 수사’란 의심을 받을 만하다.
두 번째는 그 수사에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나섰다는 점이다. 단순한 업자 횡령 따위는 특수부가 나설 사안이 아니다. 대검 중수부는 전직 대통령 서거 이후 사실상 하명 수사의 문을 닫았고, 특수1부는 부장검사가 BBK 사건 무혐의를 내린 전력으로 ‘MB검사’로 지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곳도 야당 정치인 수사에 나설 형편이 못 된다. 현 상황에서 특수2부는 검찰 수뇌부의 직할 운용이 가능한 최정예 특수수사 부서이다. 재계 620위 규모에 불과한 박연차 회장의 지방 신발공장 탈세수사에 대검 중수부가 칼을 뽑고 나선 것과 닮은 꼴이다.
세 번째는 우리 언론 사전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이미 한 전 총리가 연행된 날 언론은 검찰의 입을 빌려 대서특필했다. 이 정도는 시작이다. 앞으로 또 무슨 얘기들이 흘러나올지 모른다. “한마디만 하면 나머지는 언론이 다 알아서 굴려 주더라”는 강력부 검사 출신 홍준표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얘기는 틀린 말이 아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검찰이다. 1차 공판, 2차 공판…. 법정을 오가는 한 전 총리의 얼굴은 신문 앞면을 되풀이 장식할 것이다.
전형적 ‘먼지떨이식 수사’ 의혹
네 번째는 수사가 지방선거 반년을 앞두고 시작됐다는 점이다. 형사소송법상 1심 재판은 기소 후 6개월 내에 마무리짓도록 돼 있지만 더 길어질 수 있다. 새해 봄이 되어도 ‘한명숙의 엄동(嚴冬)’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내년 6월2일 지방선거 전까지 ‘진실 게임’의 결과는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착수 동기와 시점, 전담 부서와 진술 과정이 모두 석연치 않은 수사와 법정 다툼이 진행되는 동안 6월 지방선거는 끝나 있을 것이다. 2010년 여름, ‘한명숙 금품수수 의혹’이란 포연(砲煙)이 쓸고 간 뒤 누가 서 있고, 누가 쓰러져 있겠는가. 포는 발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