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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심리적 부검

박래용 2009. 12. 27. 10:39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사랑을 얻지 못한 자기 삶을 권총 자살로 마감한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의 중립국을 택한 뒤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진다. 많은 문학 작품에서 자살은 낭만적이거나 유의미한 죽음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살은 삶의 벼랑에서 내리는 충동적인 선택인 경우가 허다하다. 

통계 분석은 이런 자살에 일정한 유형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60대 이후 노인층과 이혼자들에게서 자살률이 훨씬 높다는 것은 개인이 느끼는 고립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종교 신자들의 자살률이 낮은 것은 공동체의 관심과 배려가 있을 때 자살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되는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모두 1만2000여명. 인구 10만명당 24.8명 꼴로 세계 5위를 기록했다. 국민 사망 원인 중 자살은 암,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 다음으로 많았으며 전도 양양한 20~30대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었다. 이미 자살자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추월했다.

더 부끄러운 것은 상황이 이런데도 지금까지 왜 여성보다 남성의 자살률이 높은지, 어떤 사람이 자살할 가능성이 높은지, 자살자는 어떤 예고행동을 보이는지 등과 같은 체계적이고도 면밀한 연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자살 시도자는 1년 이내에 9~32%가 다시 자살을 감행한다고 한다. 

자살자의 사망전 심리를 재구성해 원인을 규명하는 ‘심리적 부검’에 대한 국가 차원의 연구가 처음으로 이뤄져 발표된다는 소식이다. 흔히 부검을 통해 ‘죽은 자가 말한다’고 하듯이 자살자의 행적과 글, 주변의 진술을 바탕으로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원인을 가족이나 사회가 분명히 알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심리학적 부검은 다른 사람의 자살을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부터 미국·영국·호주 등에서는 국가 검시관이 신체부검과 함께 심리부검을 병행하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돼 있다. 

자살은 예방이 가능한 사회적 문제이다. 1990년까지 ‘자살의 수도’라고 불렸던 핀란드의 경우 국가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실시해 인구 10만명당 30명이었던 자살률을 18명까지 낮췄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심리적 부검을 통해 근거 있는 자살 예방대책을 수립해 나갈 계획이라고 하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