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들/경향의 눈
[경향의 눈] 서울지검 특수2부, 그 후
박래용
2010. 3. 1. 10:44
1996년 3월 서울지검 특수2부가 있는 11층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국내 1군 소속 건설사 전체를 상대로 한 공사 입찰 담합비리 수사였다. 현대·대림·대우·동아·삼부·풍림·삼호 등 굴지의 건설사 대표들이 검사실 철제 의자에 앉아 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보기엔 ‘담합’ 비리였지만 업계 입장에선 수십년 이어진 ‘조정’ 관행이었다. 70~80년대에는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업자들을 불러 모아 대형공사를 조정했다. 적게는 3%, 많게는 10%까지 리베이트를 상납하는 게 관행이었다. 이 돈은 대통령의 통치자금과 여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였다. 유신 시절 부정축재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도 묻는 법”이라고 항변한, 바로 그 ‘떡’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국가 조정은 사라졌지만 업자들간 사전 조정 관행은 남아 있었다.
문민 정부 들어 검찰이 여기에 칼을 댄 것이다. 특수2부 수석검사 김용철은 검사실 바닥에 소파 쿠션을 깔고 잠을 자며 수사의 빈 칸을 채워나갔다. 주임검사 오세경은 건설사 관계자를 어르고 협박하며 수사의 돌파구를 뚫었고, 검사 권성동은 돌격대처럼 피의 사실을 확인했다. 특수2부장 박주선은 수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무데뽀’ 검사들을 진두지휘했다.
수십년 적폐의 살을 긁어내고 뼈를 바른다는 의기가 합쳐졌다. 소장검사인 오세경과 권성동은 본보기로 건설사 대표 몇 명은 구속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선배들은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비리 구조를 깨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선배가 후배를, 후배가 선배를 신뢰했다. 대형 건설사 95곳의 담합 비리가 확인됐다. 건설업계 50년 부조리에 대한 최초, 최대 규모의 단죄가 이뤄졌다.
#현재
왼쪽부터 박주선, 김용철, 오세경, 권성동
그때 그 검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국적 유명 인사가 되었다. 박주선은 ‘3번 구속, 3번 무죄’의 풍파를 겪고 18대 총선에서 광주시 동구에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율(88.7%)을 기록했다. 대구에서 신격화된 박근혜(88.5%)를 제친 기록이다. 민주당 최고위원인 그는 제1야당 대표를 꿈꾸고 있다.
김용철은 소설보다 더 기구한 행로를 걸었다.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그는 수천억원대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다. 특권계급의 끈적끈적한 연대와 추락한 정의를 고발하겠다는 그는 검사 시절의 어떤 수사보다 힘든 사투를 벌이고 있다.
오세경은 지난 대선에서 ‘MB(이명박 대통령)를 만든 50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이명박 캠프에서 특수부 수사 경험을 살려 도곡동 땅, BBK, 다스 등 네거티브 공세를 막아냈다. 지난 총선에 출마해 낙선했으나 궐 밖 참모로서 기능하고 있다. 권성동은 지난해 10월 강릉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일하며 이명박 정부 법치의 이론과 실전을 뒷받침했다.
네 사람은 지금 저마다 다른 전쟁을 수행 중이다. 검사 시절 비리라는 적을 놓고 함께 싸웠던 것에 비하면 훨씬 복잡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과의 전쟁이다. 박주선은 “이명박은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오세경과 권성동은 “이 대통령은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도자”라고 맞서고 있다. 김용철은 모든 시민이 특권층의 부패에 맞서는 반부패 시민혁명을 그리고 있다.
특수2부 멤버들은 지금도 가끔씩 만난다. 삼성 비자금 폭로 이후 김용철과는 다소 소원해졌다고 한다. 박주선은 “하늘이 정해준 길이 따로 있는 모양”이라고 회고했다. 오세경은 “서로 엇갈려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김용철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10년 후
영화 같은 네 사람의 운명은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 정치판은 수시로 요동칠 것이고, 피아는 더욱 다양해져 있을 것이다. 본시 동근생(同根生)이지만 콩대를 태워 콩을 삶는 일이 비일비재한 게 세상살이다. 인생에서 적인지, 아군인지 가려주는 IFF(군용 피아식별장치·Identification Friend or Foe) 장치란 없다. 하루 앞을 내다보는 일기예보도 틀리기 일쑤인데 인생 행로의 변화무쌍을 무슨 재주로 읽겠는가. 한나라당 내분 과정에서 나온 한 친박 의원의 말은 고래의 진리다. “살다 보면 어떤 골목에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