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들/경향의 눈

‘백 투더 퓨처’

박래용 2010. 7. 19. 11:14
1985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백 투더 퓨처>의 주인공들이 달려간 미래는 30년 뒤인 2015년 10월21일이다. 80년대가 꿈꾼 2010년대는 자유와 문명과 창의가 만개하는 세상처럼 그려졌다. 영화 속 과학적 상상 중 일부는 현실화됐다. 주인공들이 깜짝 놀란 거리의 3D(입체영상) 광고판은 이제 공상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하늘을 나는 보드나 신으면 자동으로 신발 끈이 묶어지는 운동화도 등장한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백투더퓨처' (경향신문DB)




5공 군사독재 시절, 그때는 우리도 2010년대가 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하늘을 날아다니지는 못하더라도 숨 쉬고 살 만한 시대가 올 줄 알았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게 해 달라며 모르는 사람들과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내닫던 때였다. 그때는 몰랐다. 30년 뒤 미래가 이렇게 닮아 있을 줄은. 

대한민국이 언제 민주화의 단맛을 봤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이제 다시 국가 권력이 시민을 불법 사찰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지식인과 시민단체에 재갈을 물리고, 표현·집회의 자유를 원천봉쇄하고, 방송을 장악하고, 구 정권 인사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세상으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2년반 만이다. 공권력을 지휘하는 사적 권력은 다시 출현했다. ‘하나회’가 ‘영포라인’으로, ‘월계수회’가 ‘선진국민연대’로 둔갑해 나타났다. ‘사직동팀’은 42명 직원 중 절반 가까이가 특정 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공직윤리지원관실로 부활했다. 

5공 군사독재 시절과 2010년

거짓말을 해대는 것도 예나 똑같다. 23년 전 경찰은 대학생을 물고문하다 숨지게 해놓고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다. 2010년 공직 사찰기관의 책임자는 두 달 동안 민간인의 뒤를 캐고, 압수수색하고, 회사에서 내쫓고도 “민간인인 줄 몰랐다”고 변명한다. 그 윗선으로 지목받는 ‘작은 몸통’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하고, ‘큰 몸통’으로 지목받는 모모 대군은 “영포회는 공부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이들은 지금 사람 셋만 모이면 “국민은행이 국책은행이라면 우리은행은 네 은행이냐”는 조롱이 술자리 안주로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는 뜻의 ‘영포스럽다’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포항 출신의 부패방지위 별정직 4급 직원은 대통령직 인수위와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한국거래소 감사로 자리를 옮겨 연봉 4억3000여만원씩 돈벼락을 맞고 있다. 포항 출신 청와대 비서관의 6촌 형은 35년간 외청에서 근무하다 2년 사이 농식품부 과장→부이사관→고위공무원단을 거쳐 수협 감사위원장으로 벼락 출세했다. 나라의 벼슬 자리가 뒤주의 강냉이처럼 뿌려진 것이다. 관가에선 “포항 출신이면 개도 출세한다”거나 “포항 출신은 약에 쓰려 해도 없다”는 뒷말이 횡행한다. 

조선조 어느 세도가도 이 정도로 권력을 주물러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야당에서 모모 인사들을 십상시(十常侍)에 비유한 것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시는 중국 황제의 내시를 이르는 것이요, 십상시는 후한 말 조정을 농락한 10명의 환관들이다.
십상시의 수장 장양의 친인척과 주변 인사는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위세를 부렸다. 맹타라는 사람은 그의 종들에게 접근해 선물을 주며 “길에서 나를 보면 인사나 한번 해달라”고 했다. 다음에 길에서 만난 종들이 맹타를 향해 절을 하자 사람들은 그가 장양과 아주 친하다고 여기고 몰려들었다고 한다. 맹타는 나중에 자사(刺史·주 장관) 관직까지 얻었다. 이른바 ‘맹타의 처세’다. 온 나라에 십상시와 맹타 같은 자가 사방팔방에서 권세를 휘두르면서 한나라는 제 풀에 망했다. 

‘하나회’의 권세 닮은꼴 ‘영포회’

한나라당의 남경필 의원은 “민간인 사찰, 영포라인·선진국민연대 같은 비선라인, 이건 권력 기반 자체가 무너지려고 하는 것”이라며 “지금 대통령도, 당도 아닌 나라가 망하려고 한다”고 개탄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식민 지배와 군사독재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나라가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기에 이처럼 빠르고 쉽게, 어이없이 과거로 돌아가게 됐을까.

영화 <백 투더 퓨처>의 주인공들은 과거로 돌아가 조그만 변화를 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우리도 잠깐 과거로 돌아간다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오늘의 이런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