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MBC에 기자들은 많다

박래용 2012. 6. 6. 22:30

사관(史官)은 역사의 초고를 쓰는 자리다. 중국 제나라의 우상(右相) 최저가 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뒤 사관인 백에게 말했다. 임금이 학질로 죽었다고 실록에 쓰라는 것이었다. 백은 ‘5월 을해일에 최저가 그 임금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대로한 최저는 백을 죽여버렸다. 백의 세 동생인 중, 숙, 계도 모두 사관이었다. 최저가 중에게 실록을 다시 쓰라고 하자 형과 똑같이 기록했다. 중도 죽었다. 숙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남은 막내 계도 형들과 똑같이 기록했다. 기가 막힌 최저가 시키는 대로 쓰면 살려주겠다며 위협했다. 계가 답했다.

 

“사실을 바른 대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를 맡은 사람의 직분입니다. 자기 직분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오늘 내가 쓰지 않더라도 반드시 천하에 이 사실을 쓸 사람이 있을 것이니 최우상이 저지른 일을 감출 순 없습니다.”

 

최저는 포기하고 말았다. 남세스러운 얘기지만 요즘엔 언론이 사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권력의 감시견이 아니라 안내견·애완견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간혹 사관의 기개를 보일 때도 있다. 질식할 듯한 절망 속에서도 언론이 살아있으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바른말 하는 언론을 횃불처럼 의지해 군사독재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경험도 있다.

 



언론장악 중단하라 (경향신문DB)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상 유례없는 언론사의 총파업이 4개월째 진행 중이다. 임금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요, 근무환경을 개선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정론직필, 공정보도 좀 해보자는 것이다. MBC는 129일, KBS 93일, YTN 48일, 연합뉴스는 84일째다. 모두 나라님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인사들이 사장으로 내려간 곳이다. MBC는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2년 동안 선거 때마다 편파방송을 했고, 권력층 비리 보도는 축소했으며, 정권에 까칠한 뉴스는 외면했다는 게 노조의 분석이다. 바깥에서보다 안에서 내린 자가진단이니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나라를 뒤흔든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썩은내가 진동한 측근 비리에 관한 뉴스보다 ‘야구장에서 좋은 자리 잡는 법’ ‘개성만점 여행 가방’ 소개가 더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사건은 대법원이 “정당한 감시와 비판”이라며 무죄를 내렸지만, 오히려 MBC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다. 날씨·휴일 스케치가 메인 뉴스를 도배질하고 사람보다 동물 근황 보도가 더 많다고 <뉴스데스크> 대신 ‘날씨데스크’ ‘동물데스크’라는 말도 나왔다. 젊은 기자들은 취재 현장에서 내쫓기고 돌팔매질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른 보도를 하겠다고 들고 일어선 것이 MBC 파업의 본질이다. 다른 곳도 별반 다르지 않다. MBC 노조 특보를 보면 김재철은 언론인이라기보다 물 좋은 가게를 차지한 졸부 2세 같다. 여성 무용가에게 수년 동안 20억원이 넘는 공연료를 몰아주고 법인카드를 7억여원이나 물쓰듯 펑펑 썼다는 의혹은 여러 일탈 행각 중 하나일 뿐이다. 같은 기간 KBS 사장보다 7배나 많이 카드를 긁고, 그 중 휴일 결제가 40%를 넘는데도 “휴일에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란다. 사장이 그렇게 일을 많이 한 방송사의 시청률은 반토막이 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감사원·교과부·방통위·검찰·경찰·보수시민단체·보수언론이 총동원돼 KBS 정연주 사장을 탈탈 털었던 잣대에 비춰보면 김재철은 자리를 지키기는커녕 지금 감옥소에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정권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정권 출범 한 달도 안돼 “사퇴 0순위는 정연주 KBS 사장”이라며 해임 시나리오를 착착 밟던 집권 여당은 이제 “언론사 내부 문제에 외부세력이 끼어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딴소리를 한다.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

 

아마도 청와대와 여권은 방송사 파업을 이대로 놔두는 게 득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대선을 앞두고 극악스러운 무리에게 방송을 넘겨줄 순 없다는 것이고, 정권에 불편한 보도를 듣느니 차라리 식물방송 상태가 더 낫다는 것이다. 김재철을 사퇴시키면 다음엔 KBS, YTN, 연합뉴스 사장까지 줄줄이 자빠진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것이다.

 

김재철의 거취는 개인의 결심을 넘어선 듯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리를 사수하라는 주문을 그는 ‘재신임’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살아났다고 생각한 그는 연일 신문광고에, 최후통첩에, 추가 징계라는 칼춤을 추고 있다. 지금까지 7명이 해고됐고 106명이 징계를 받았으며, 35명이 대기발령 상태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대학살’에 버금가는 무자비한 탄압이다. 파업 중인 사원들은 3월, 4월, 5월 내리 ‘0원’이라고 찍힌 봉급명세표를 받았다.

 

수천년 전 제나라의 폭군도 결국 사관의 기개에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언론의 직분을 지키려는 기자들의 저항을 꺾을 수 없다. 박성호·이용마·정영하·강지웅…. 이들 해고자 뒤에도 MBC엔 기자들이 많다. 김재철은 내년 살구가 익기 전까지 야인이 될 것이고, 그의 행적은 낱낱이 기록될 것이다. 이것도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