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2’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추적자>가 인기를 끈 이유는 현실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강동윤은 집권당의 대선 후보다. 수려한 외모, 유려한 언변, 이지적 눈빛.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이미지의 현직 국회의원. 지지율 60%대의 엄청난 인기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미래 권력, 차기 지도자다. 만약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강동윤은 대통령에 당선됐을 것이다. 그 우연한 사고가 없었다면 재벌·정치인·판검사·언론계의 위선과 음모, 공생과 협잡의 권력은 계속됐을 것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로 나온 집요한 추적자 백홍석이 없었다면 그들의 세계는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성(城)은 현실에서 더욱 공고하다. 드라마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거대 양당 체제는 영·호남 지역 기반에 안주하며 손에 틀어쥔 특권을 놓지 않고 있다.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오만과 횡포는 30년 가까이 한 세대 동안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 나라가 결딴날 뻔한 위기를 몇 차례나 겪으며 국민들은 정치적 무능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가슴만 쳐왔다. 성장의 과실은 가진 자들이 더 가져가고 1 대 99로 상징되는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공교육은 붕괴되고, 패자부활전은 사라졌으며 어렵게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중소기업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노동시장에는 비정규직만 넘쳐난다.
SBS <추적자> 6회에서 강동윤(김상중 분)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백홍석(손현주 분)에게 "용서는 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포기다"라고 말했다. /SBS방송 캡처 화면
드라마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현실의 인물들은 그보다 더 재미있다. 국회의장은 사실(史實)의 평가를 놓고 “5·16은 중2라 어려서 별 지각이 없었다” “10월 유신은 군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라 별로 관계가 없다”고 했다. 집권당 원내대표는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 특검과 관련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도 특검에 포함시키자”고 한다. 정의의 상징인 대법관 후보로는 위장전입·다운계약서 작성·탈세·아들 병역 특혜·수사 축소 개입 의혹으로 얼룩진 TK 출신 법무장관 후배가 추천된다. 대법관 다양화 요구를 다양한 의혹의 후보로 맞받았으니 반전의 극치다. 낙하산으로 내려간 공영방송 사장은 구정물을 얼굴에 칠갑하고서도 유임을 자신한다. 이쯤되면 정극(正劇)보다 ‘개그콘서트’에 가깝지만, 엄연한 리얼이다.
드라마는 오히려 점잖은 편이다. 16부작 미니시리즈로는 현존하는 악당 캐릭터를 다 담을 수 없는 한계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훨씬 스펙터클하다. 집권 여당은 현 대통령을 배출해낸 정당이다. 선거 승리의 과실을 냠냠 나눠 먹었듯 정권의 실정(失政)에도 공동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한데도 측근 비리, 민간인 사찰, 선관위 디도스 공격 같은 정권 차원의 범죄 다발 속에서 집권당은 총선에서 버젓이 승리했다. 당명을 바꾸고 색깔을 덧칠한 것만으로 ‘정권 심판론’은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5만원짜리 돈다발 관봉을 돌아가신 장인이 준 돈으로 발표하는 검찰이다. 의원 비서관의 선관위 홈페이지 해킹은 룸살롱에서 장난으로 모의한 거란다. 정권 4년 반 내내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지냈던 공범이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둔갑하는 게 현실이다. 그 사이 멘토 7인회니, 육사 사열이니 5공 군부 세력까지 관 뚜껑을 열고 꾸물꾸물 등장하고 있다. 납량 특집보다 더 무서운 좀비들의 귀환이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새누리당이 아니라 민정당”(정두언 의원)이라는 탄식이 나올 지경이다. 오래지 않아 12·12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요, 5·18은 “지방출장 중인 때라 잘 모르겠다”는 대선 후보, 국회의장, 장관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백홍석은 "왜 포기하지 않느냐"며 소리치는 강동윤에게 "아버지니까"라고 답한다. /SBS방송 캡처 화면
작가의 상상력으로도 생각해내기 어려운 가공할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현실이다. 기득권 세력은 1990년 3당합당 이후 그 전의 독재 대 민주의 대결 프레임을 보수 대 진보의 프레임으로 대체시키는 데 성공한 듯하다. 보수는 반북이고 체제 수호세력이며, 진보는 친북이고 반국가로 정의하는 등식이다. 툭하면 나오는 국가 정체성이나 색깔론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담고 있다.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으로는 승산이 없지만 ‘빨갱이 담론’으로는 반대세력을 무력화하는 데 백전백승, 언제든 잘 먹혀들기 때문이다. 민주·평화·복지는 강동윤이 말하면 시대정신이고, 새로운 세력이 쓰면 위험한 포퓰리즘으로 변한다.
<추적자 2>가 만들어진다면 이젠 스토리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사필귀정이 이뤄져선 안된다. 정치권력, 자본권력, 검찰권력, 언론권력의 생얼굴을 드러내고 모두 제자리로 돌려 놓아야 한다. 상식이 비상식을 물리치고, 공정이 불공정을 이기고, 정의가 부정을 압도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추적자> 마지막 회에서의 대선 투표율은 91.4%였다. 작가는 픽션에서나마 4·19 혁명을 은유한 것일까. 현실에서 우연한 교통사고는 없다. 천사의 가면을 벗겨줄 백홍석도 없다. 국민 모두 추적자가 되어야 드라마와 같은 결말이 현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