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가 누구예요?” 어느 젊은 기자가 물었다
박래용 | 디지털뉴스편집장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병원에 있을 때다. 마지막 비서관 최경환에게 어느 젊은 기자가 묻더란다. “신군부가 누구예요?” 신군부란 사람은 없다. 불과 한 세대 전의 일도 누군가에겐 ‘태정태세문단세’만큼이나 아득히 먼 역사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이에게 33년 전, 유신체제 마지막 주 풍경은 영화 속 장면 같을 것이다.
1979년 10월16일 오전 10시, 부산대 도서관 앞에 5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부산 시내로 진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는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며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공화당사의 셔터문을 부수고 서류와 집기를 밖으로 내던졌고, 파출소 벽에 걸려 있던 박정희의 사진을 찢어 팽개쳤다. 공수부대가 시민과 학생을 진압했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몇 백만명을 죽였어도 문제없었다. 탱크를 동원해 몇 만명쯤 뭉개 버리면…”이라고 했다.
부산 광복동에서 대학생들이 민주화와 독재 타도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경향신문DB)
현대사의 질식할 것만 같았던 압제의 사슬이 저절로 풀렸던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공기, 민주의 햇살은 누군가의 열정과 용기,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하 정치·사회·경제 전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다. 민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열흘 뒤 박정희 대통령은 사망했고 유신체제는 종막을 고했다.
정상적이라면 이때 독재 청산이 이뤄졌어야 했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은 순진했고 방심했다. 그 틈을 비집고 차지철의 부하 전두환·노태우는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서울의 봄은 짧았고, 기나긴 군부독재가 다시 시작됐다. 친일은 유신에서, 유신은 신군부 치하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일제와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반일·반독재 세력은 다시 불순분자와 빨갱이로 내몰리고 짓밟히고 신음해야 했다.
이 나라는 해방 후 67년 동안 무엇 하나 속시원하게 정리해본 적이 없다. 일제 청산도 독재 청산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이승만은 일제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를 때려잡았다. 황군 장교 출신 박정희는 해방된 반도에서 18년간 1인 독재를 펼쳤다. 5·6공은 박정희 체제를 그대로 계승했다. 신군부는 차지철이 못했던 ‘피의 학살’을 1980년 5월 광주에서 감행했다. 무도한 역사다. 승자는 역사를 전유했다.
친일·독재 세력은 과거 행적을 비판받을 때마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한다. 속뜻은 “그냥 넘어가자”는 얘기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뒤 비시를 수도로 수립된 친독 정권의 대통령 페탕도 “역사는 내가 국민을 위해 했던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는 그런 말에 현혹되지도, 역사에 맡기지도 않았다. 비시 정권에 몸담았던 정치인, 외교관, 학자, 군부 인사 등에 대한 처단이 수년간 이어졌다. 나치 독일을 찬양하는 기사와 논설을 쓴 언론인들은 총살을 당했다. 자동차 회사 르노는 독일에 비행기와 탱크를 제작해주었다는 이유로 국유화되었고 사장은 옥사했다. 독일 대사 부인에게 꽃을 보낸 사람, 관 앞에 나치식 인사를 한 장의사도 처벌받았다. 비시 정권 4년간의 부역으로 703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1만1343명이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며, 9만5000명이 공민권을 박탈당했다.
청산은 가혹하리만큼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36년간의 일제 부역자에게 손 하나 대지 못했다. 공화당이 민정당이 되고, 민정당이 한나라당이 됐다. 매국을 해도, 이적을 해도, 쿠데타를 일으켜도 떵떵거리며 큰소리 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독립군을 사냥한 간도특설대 장교 백선엽이 위대한 군인으로 미화되고, 5공 ‘하나회’ 출신이 국회의장에 올라 ‘새 정치’를 운운하는 판이다. 그러니 홍사덕이 “유신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국민을 조롱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자동차든, 반도체든 무슨무슨 산업 육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제2, 제3의 독재를 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자업자득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것인가. 누대에 걸쳐 온 나라에 ‘카피탄 리’가 활개치도록 내버려둔 주역은 바로 국민들이다. 정치는 꼭 유권자의 수준만큼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게 새 질서를 염원하는 국민들은 번번이 속았고 패배했다. 수호세력은 사생결단이었지만, 유권자는 느슨했다. 청산해야 할 때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청산되어야 할 세력에 의해 바로잡힌 경우는 없다.
박근혜 후보의 사과는 1998년 정치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나왔다. 그간 5·16과 유신, 인혁당을 언급할 기회는 수십, 수백 차례 있었고 실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불가피한 선택” “구국의 결단”….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가 대표로 있던 당에선 지난 정부 시절 과거사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흔들었다. 이제 지지율이 추락하는 시점에 그가 고개를 숙였다. 궁금하다. 사과 전의 박근혜와 사과 후의 박근혜는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경향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