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통치
공안검사라고 다 같지는 않다. 크게 세 등급이 있다. 맨 아래 하등급이 일 잘하는 검사다. 곰을 잡아오라면 즉시 산에 올라 곰 발자국을 쫓고 덫을 놓는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이런 검사는 널려서 어디 축에도 못 낀다.
중급이 말귀 알아듣는 검사다. 윗분이 ‘시커멓고 커다란 거 뭐 없을까’라고만 해도 문 닫고 돌아서자마자 곰을 잡으러 산으로 뛰어간다. 대부분 공안검사들의 특징이다. 시커멓고 커다란 것이 뭔지를 놓고 회의나 열고 있으면 ‘답답한 검사’란 딱지가 붙고, 다음 인사 때는 방을 비워줘야 한다.
상급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하는 검사다. 이런 검사들은 곰이 없으면 쥐라도 잡아온다. 과거엔 “저는 (쥐가 아니라) 곰입니다”라는 자백도 뚝딱 받아냈다. 요즘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대신 원래 곰이었는데 신분을 숨기려고 몸집을 줄였다거나, 곰이라는 정황증거가 다수 확보됐다고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 정도는 돼야 ‘공안 좀 하네’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다음은 보수언론의 몫이다. 추운 이북에 서식처를 둔 종북좌파 곰이 잡혔다느니, 노무현 정부 때도 잡혔는데 쥐라고 풀어줬다느니…, 낯익은 풍경이다. 여당 아침 회의에선 ‘곰’을 뒤집으면 ‘문’ 아니냐면서 문 아무개는 곰과의 연루 의혹을 밝히라는 의원이 나온다. 최근 공안검사 출신 젊은 초선 의원이 그런 식의 맹활약을 하면서 ‘보수의 아이돌 스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순방 중엔 파리 시위자들에게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협박했다는데 윗분의 불편한 심기를 헤아린 공안검사다운 촉이다.
공안검사의 후각은 동물적이다. 윗분의 의중을 빨리 읽고, 통치 장애요인을 제거하고, 여권의 정국 장악을 뒷받침한다. 공기업 자리를 필요로 하신다 싶으면 전 정권 낙하산들을 탈곡기에 낱알 털듯이 훑어내는 식이다. KT 이석채 회장은 “직원들의 고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사퇴한다”고 했다는데, 경제수석에 장관까지 지낸 인사가 이런 일을 난생처음 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우습다. 빈자리 나기만 기다리는 개국공신이 청와대 앞에 10리, 20리씩 줄서 있다는 사정을 안다면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진작에 짐을 쌌어야 했다. 내년 3월에 그만두겠다고 강판 예고한 포스코 회장은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이다. 앞으로 제3, 제4의 이석채·정준양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문재인 소환, 전공노 수사…. 대통령이 해외순방 나가 있는 동안 밀린 숙제 해결하듯이 굵직한 현안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솜씨를 보라. 대통령은 런던에서 모닝 커피를 마시며 헌정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문서에 사인을 했다. “경들의 뜻이 그러하다면…”식이다. “군주는 미움을 받는 일은 타인에게 맡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친히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통치 교본인 <군주론>에 나온 그대로다.
사고는 항상 과잉 충성에서 나온다. 참고인 문재인은 공개 소환해 포토라인에 세우고, 피의자 김무성은 뒤로 서면조사한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오죽하면 보수언론에서조차 ‘검찰, 이렇게 물정 어두워서야 어떻게 제구실 하겠나’(조선일보 11월9일 사설)라고 개탄했을까. 진짜 고수는 상대가 베인지도 모르게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눈치코치없는 서툰 칼질로 야당에 특검을 주장할 명분을 줬으니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 검사다.
공안 시나리오는 외과수술처럼 정교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전공노 수사다. 대통령이 침묵하는 동안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이 “공무원들이 박근혜 지지 댓글만 달았느냐”고 언급할 때 전공노는 이미 레이더에 잡혀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박 대통령이 “공무원 단체가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은 발사 명령이다. 여당과 안전행정부, 보수언론이 일제히 몰아붙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검찰은 수사를 개시했다.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 게 거의 종합예술 수준이다.
정권 유지의 최후 수단은 무장 군인이다. 현대 정치에서는 무력통치가 공안통치로 변형됐다. 총과 칼을 앞세운 무력보다 법과 질서를 내세운 공안통치가 더 넓고 깊고 위협적이다. 히틀러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나에게 (그가 말한) 한마디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공안의 능력은 그만큼 무한하다.
현 집권세력의 국정운영 기조는 공안통치다. 공안으로 물타고, 공안으로 맞불 놓고, 공안 폭탄을 꽝 터뜨리는 식이다. 나라는 온통 전쟁터로 변하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국민이 아닌, 정부에 의한 소요(騷擾)다.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을 국정운영의 중추기관으로, 김기춘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리 찢기고 저리 갈린 국민을 한데 모아 국민대통합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 기대했다. 지금 이런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럴 줄 몰랐느냐고 하면 할 말 없을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박래용 | 정치에디터 겸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