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서

‘말이 안통하네뜨’

박래용 2014. 1. 8. 21:00

대면(對面)이 꼭 좋은 게 아니다. 모르고 지내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다.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 얘기다. 대통령 인식을 직접 확인하니 집권 2년차도 작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비관만 뚜렷해졌다. 어전회의에 나온 신료들처럼 양 옆에 도열한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은 꽉 막힌 정권의 전경(全景)을 보는 듯했다.



☞ [화보]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하는 박 대통령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의 “자랑스러운 불통” 발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45초 브리핑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한국갤럽이 매주 내놓는 박 대통령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소통이 미흡하다’는 응답은 7%→11%→15%→18%→20%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불통지수다. 극우 단체인 국민행동본부에서조차 “대한민국이 앞으로 더 나가려면 ‘비정상’인 대통령의 소통이 ‘정상’의 소통으로 돌아오는 것이 첫 출발이어야 한다”는 논평을 내놓았을 정도다. 


대선공약으로 그렇게 외치던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기자회견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화합 얘기도 없었다. 대탕평 얘기도 없었다. 대선 때는 시대정신이었으나 선거 후엔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이 된 것이다. 가면을 벗어던진 박근혜 정권은 이명박 정권보다 더 퇴행했다. ‘박근혜 정권 1년차’가 아닌 ‘이명박 정권 6년차’란 조롱이 빈말은 아니다. 


소통의 전제 조건이 ‘준법’이라고 했다. 서류심사하듯 자격을 갖췄는지를 보고 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나라, 어떤 조직에서나 구성원들은 불복종할 권리를 갖고 있다.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다. 시민 불복종은 정부에 대해 이의를 표시하는 엄연한 정치 행태다.


법과 원칙은 항상 지배자의 무기였다. 법이 돈 없고 ‘빽’ 없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드물다. 법의 시초가 그렇다. 법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강제되는 사회규범이다. 행위의 준칙을 정해놓고 그 선을 위반하는 경우엔 제재를 가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은 위기 때마다 법과 원칙을 외친다. 히틀러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법과 원칙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정의와 상식은 법 위의 개념이다. 바르고 곧은 것이 정의요, 시민의 건전한 견해가 상식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시민의 요구가 바로 정의와 상식이다. 30년 지난 과거를 다룬 영화 <변호인>이 돌풍을 일으키는 건 그만큼 현실에서 정의와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란 구호는 더 기가 막히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검찰총장 찍어내기, 낙하산 인사, 종북몰이, 역사왜곡 같은 비정상을 자행하는 정권이 무엇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지금 정부가 하는 일이 정상적이어야지, 정부는 비정상적으로 하면서 다른 것을 정상화하겠다고 하면 국민들이 신뢰하겠습니까.” 한때 한나라당에 복무했던 인명진 목사의 얘기다. 세간에선 ‘말이 안통하네뜨’ ‘참죠경제’ ‘국민항복시대’ 같은 패러디가 자고 일어나면 새로 생겨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도 이 정부에선 이적·종북 발언으로 처벌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 대선개입 사건은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다. 박 대통령과 MB(이명박)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감사원의 4대강 사업 감사결과가 나온 당일 박 대통령의 복심인 이정현 수석은 “4대강 사업은 국민을 속인 것”이라고 직공했다. 4대강 사업은 공격하면서 MB 정부 국가기관의 불법을 감쌀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1년 내내 특검에 발목 잡힌 채 국정 표류 상태를 자초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출처: 경향DB)


신년 대담을 진행하며 두 교수에게 물어봤다. 진보성향의 조국 교수는 “박근혜 후보 선대위가 댓글 사건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보다 덮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니까 겁을 내는 것”이라고 했다. 


보수진영의 윤평중 교수는 “지배집단의 동질성과 연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거캠프의 수족을 잘라야 되는 사태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MB 쪽만 치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분석했다.


뭔가 걸리는 게 있어 피하는 것이란 얘기다.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민심을 먹고사는 정치인 박근혜가 어울리지 않게 율사적 대응을 하는 것부터 이상하다는 게 항간의 의심이다. 어영부영 이 문제가 잊혀지리라고 기대하는 건 우둔한 판단이다.


불법은 묻어놓으면 묻힌 깊이만큼 폭발력도 커진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외쳤다. “진실은 지하에 묻혀버리지 않는다. 진실은 지하에 묻히면 스스로 자라난다. 마침내 자라난 진실은 무서운 폭발력을 지닌다.” 그의 선언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유효하다. 압제에도 왜곡에도 진실은 자라고 폭발한다.



박래용 정치에디터 겸 정치부장 leo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