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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용 칼럼

“적폐는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의 사(史)자는 가운데 중(中)자를 손으로 쥔 형상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현실만 직시하라는 의미다. 그 현실에서 미래를 배우는 것이 역사다.”

 

몇 해 전 인터뷰에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 얘기다. 노(老)사학자는 “역사의 발전이 일시 멈출 수는 있다. 그러면 그걸 회복하기 위한 혁명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했다. 지난 정부에서의 법치·민주주의 퇴행이 역사 발전의 일시 멈춤이었다면, 촛불은 그를 회복하기 위한 혁명이었을 것이다.

 

촛불 이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당장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는 않더라도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좋은 나라를 위해 각자 책무를 다할 줄 알았다. 많은 시민들의 바람이었고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촛불 1년이 지났고, 새 정부 출범 반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다.

 

10월 2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집회 1년을 기념하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과거의 것이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을 위기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은 위기 곱빼기 상황이다. 낡은 적폐는 여전히 죽지 않았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위기의 진원지는 여의도다. 시민들이 시작한 거대한 변화는 정치 앞에 멈춰 섰다. 수구야당·수구언론은 거의 모든 개혁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다. 적폐연대다. 100대 촛불개혁과제 중 지금까지 실현된 것은 ‘이재용 등 재벌총수 구속’ ‘검찰의 청와대 편법근무 방지’ 2개에 불과하다. 국회 입법이 필요한 69개 과제는 단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릇된 것을 깨뜨리는 파사(破邪)도, 바른 것을 드러내는 현정(顯正)도 지지부진이다. 대통령 한 사람 물러났다고 파사와 현정이 단숨에 이뤄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치인이란 그들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중대한 문제들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해학 사전에 오른 정의다. 블랙리스트·언론장악·여론조작 등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뿌리째 흔든 정치공작 실태는 그들이 없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중대한 문제들이다.

 

사석에서 만난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보수세력은 정권이 바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무도한 일을 거침없이 저지르고, 기록을 남기고, 캐비닛에 보관해 뒀겠는가”라고 말한다. 정권교체는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 한 사람 고개 숙여 사죄한 적이 없다. 사죄는커녕 아직도 역사의 물꼬를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조차 의문이다. 박석운 퇴진행동기록기념위 공동대표는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이 진행되지 않는 병목은 바로 국회다. 국회로 촛불이 옮겨붙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총선은 아직 2년 넘게 남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시스템 만능주의자였다. 그는 법과 시스템을 바꾸면 사회가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보수 정권으로 바뀌니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깨어 있는 인식이다. 사회적 합의에 의한 기본적 풍토의 변화가 필요하다. 1700만 촛불은 지역과 이념, 남녀노소를 초월한 변화와 개혁의 강력한 동력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조산하(再造山河·나라를 완전히 새로 만든다)’를 약속했다. 개혁을 하려면 기득권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과감한 도전과 실천,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너울은 바람에 의해 일어난 파도다. 물결 중에서 가장 거칠고 사납다. 파도의 폭과 주기가 길어 겉보기엔 잠잠한 듯 보인다. 하지만 해안에 부딪치면 위력이 수십 배 커진다. 시민이 바람이요, 파도다. 문 대통령은 바람과 파도를 하나로 묶어 저항세력을 돌파하지 못했다. 2017년도 이렇게 저물어 간다. 아쉽고 안타깝다. 노교수는 지난번 혁명 이후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다시 물어봤다.

 

- 혁명 이후 수구세력의 저항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반혁명 시도는 늘 있다. 적폐가 깊고 어두울수록 저항은 더 크다. 여기에 눌리느냐, 뛰어넘느냐는 전적으로 혁명세력의 역량에 달려 있다.”

 

- 과거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가.

“4·19혁명 이후 들어선 장면 정권과 비슷하다. 시민이 혁명을 주도했지만, 정권은 정치세력이 쥔 것이다. 촛불도 시민이 주체였지만 새 정부는 여기에 얹혀 집권했다.”

 

- 촛불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권은 스스로 힘이 없으면 힘을 빌려야 한다. 혁명주체세력(시민)과 합쳐 뿌리를 내리고 우군을 넓혀야 한다. 그다음에 좀 더 강하고 과감해야 한다. 적폐는 결코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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