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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들/아침을 열며

[아침을 열며] ‘깨진 유리창’

15년 전인 1994년 10월 추석 연휴에 국민들은 ‘지존파’란 괴물에 몸서리를 쳤다. 20대 청년 7명은 비밀 아지트와 사체 소각로를 갖추고 사업가 등 5명을 차례로 납치해 살해했다. 백화점 VIP 고객들이 주 표적이었다고 한다. “더 못 죽이고 잡힌 게 한이다. 잡히지 않았으면 100명까지 죽일 생각이었다”고 했다. 

당시 취재기자로 그들과 단독 인터뷰를 한 기억이 난다. 현장 검증이 이뤄진 전남 영광에서 서울로 가는 도중 경찰 호송버스 안에서다. 그들은 수갑을 차고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십수년 전의 낡은 취재수첩을 찾아보았다. 신문에 못 실은 얘기가 담겨 있었다.

“지갑에 얼마 있어?”

행동대장 김현양은 옆자리에 앉은 내게 다짜고짜 지갑을 보자했다. 지갑엔 출장 중 쓰고 남은 7만원이 들어 있었다.

“더럽게 사네. 기자들도 다 때려 죽이려고 했는데…. 내가 대전에서 식당 종업원 할 때 ○○일보 기잔가 자주 오는 놈이 있었는데 ‘야 인마’가 제일 잘해주는 말이야. 공무원들하고 자주 왔었는데 경찰도, 구청공무원도 그놈 앞에서는 쩔쩔 매더라고. 사장도 굽실굽실하고…그건 왜 그래요. 기자가 그렇게 세요?”

‘지존파’ 그 후 세상이 달라졌나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3시간여 동안 계속됐다. 김은 내가 준 담배를 피운 뒤 왼쪽 팔뚝에 비벼 껐다. 

“돈있는 놈들은 지네들만 잘살려고 그래. 우리 같은 놈들은 동물 보듯이 하고…서러워서 했어. 사람들에게 꼭 말해줘요. 우리 같은 놈들 또 나온다고…백화점 다니는 아줌마들, 없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이 해달라고 해줘.”

김은 “그동안 받았던 사회의 냉대를 되갚아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다음해인 95년 11월 지존파 일당 중 한 명만 빼고 김기환(당시 27세)·김현양(23)·강동은(23)·문상록(23)·강문섭(21)·백병옥(21) 등 6명은 사형이 집행됐다. 

군포 살해사건이 밝혀지면서 역대 연쇄 살인범들 이름에 지존파가 꼽히고 있다. 군포 살해범 강호순이 섹스와 살인 충동이 복합된 개인 인격장애인이라면 지존파는 범죄 동기를 불평등한 사회적 모순으로 돌리려 했다. 그때도 난리가 났었다. 생계형도 복수형도 아닌, 이른바 ‘사회형 범죄’의 출현에 시민들은 긴장했다. 

“빈부격차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도 유사 범죄가 나올 수 있으므로 대비해야 한다.”

온갖 진단과 처방이 쏟아졌다. 그 이후 세상이 달라졌는가. 분석은 말뿐 사회는 증오와 대립, 갈등이 더 커졌으면 커졌지 줄지는 않은 것 같다. 양극화는 이제 단순한 빈부격차를 넘어 ‘상호 손해’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없는 자들은 공격적이 되고, 부자들은 심리적 부담을 느껴 서로 손해가 되는 구조다. 

그럴수록 ‘톨레랑스(tolelance·관용)’는 절실히 요구되는 공공의 덕목이다. 개인적·집단적 불만이 크고 작은 포용력에 흡수되지 못할 경우 언제, 어디서든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적개심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거꾸로다. 이명박 정부에선 톨레랑스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무관용 원칙(제로 톨레랑스)’이 주요 국정 방침임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올해 나이 일흔 하나, 서울 용산 한강로에서 17년 동안 갈비집을 운영해온 이상림 할아버지는 용산 철거민 진압에서 숨졌다. 칠순 노인은 벼랑 끝에서, 한강 다리에 가는 심정으로 옥상 망루로 올라갔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접고 아버지를 도왔던 서른 일곱살 아들은 상중(喪中)에도 구속됐다. 국가는 이들에게 ‘도심 테러리스트’란 딱지를 붙였다. 

일벌백계 외치는 ‘무관용 사회’

무관용 원칙은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 이론에서 비롯된다. 건물에 깨진 유리창이 한 개만 있어도 건물 관리가 허술한 것으로 여겨져 깨진 유리창은 점점 늘어난다는 이론이다. 전체의 질서를 위해 사소한 잘못이라도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논거다.
사회는 갈수록 승자 독식 체제가 공고해지고 있다. 그 와중에 켜켜이 쌓여가는 ‘20에 대한 80’의 소외·반감·증오를 일도양단 깨진 유리창으로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 온 사방 천지가 깨진 유리로 뒤덮여도, 우리 사회 20%들은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