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미국 대법원 판사였던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프라이버시’를 최초로 법적 보호대상으로 규정한 법관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라이버시를 권력이나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른바 ‘홀로 남겨질 권리(Right to be left alone)’로 개념화했다. 그 이후 ‘나를 내버려두라’는 프라이버시는 인권을 대표하며 모든 권리의 상위에 자리잡는 가장 소중한 권리가 됐다.
그런 브랜다이스 판사가 어느 겨울날 퇴근길 대법원 청사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길에 미끄러져서다. 이를 본 행인들의 반응이 재밌다. “아, 브랜다이스 판사도 신은 아니었구나.”(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사법왕국의 허와 실’)
재판장의 판결이 신의 뜻으로 간주되던 때가 있었다. 신정(神政)통치다. 판결은 사람을 통해서 나오지만, 그것은 신으로부터 넘겨받은 권한이란 것이다. 법치주의에서 재판은 사람이 한다. 사람들은 이제 판결이 법관의 판단에 불과할 뿐이란 사실을 다 안다. 그런 판결에 무승부란 없다. 한 쪽은 패소하게 마련이고, 패소자가 판결에 불만을 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2005년 2월 미국 시카고에서 판결에 불만을 품은 남성이 연방 여(女)판사의 집에 들어가 판사의 남편과 노모를 권총으로 살해했다. 범인은 대학병원에서 구강암 치료를 받으면서 윗이빨을 모두 뽑았는데 이를 의료과실이라고 주장하며 10여년 동안 소송을 벌여왔다. 패소가 되풀이되면서 범인은 점차 편집증 증세를 보였다는 게 나중 조사 결과다. 범인은 “판사가 이웃에게는 천사였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나치와 같은 범죄자요, 테러리스트”라고 했다.
판결 불복 사례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빈발하고 있다. 판결이 신의 영역에서 사람의 영역으로 내려올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2005년 우리 법원에서 내려진 판결은 모두 154만건. 판사 1인당 894건 꼴이다. 이 모든 판결이 불량률 ‘제로(0)’일 수는 없다.
재판을 3심제로 운영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인 판사의 한계를 자인한 때문이다. 같은 해 형사 사건의 경우 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진 파기율은 5.9%에 달했다. 민사 사건 대법원 파기율도 5.0%이니 재판 오심률이 대략 그 정도쯤 되지 않을까 싶다.
재판을 3심제로 운영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인 판사의 한계를 자인한 때문이다. 같은 해 형사 사건의 경우 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진 파기율은 5.9%에 달했다. 민사 사건 대법원 파기율도 5.0%이니 재판 오심률이 대략 그 정도쯤 되지 않을까 싶다.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판사 석궁테러사건 이후 법원 판결의 불합리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본질은 이와는 다르다. 학교는 김씨에 대해 교육자적 자질 부족을 이유로 들어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김씨는 이것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김씨는 학교측이 내놓은 교육자적 자질 미흡 부분을 조목조목 깨부숴야 했다. 요즘 온라인에서 전개되는 학술단체나 제자들의 탄원이나 반박 같은 것도 재판 도중 차곡차곡 준비하고 제출됐으면 요긴했을 훌륭한 증거들이다.
그렇다면 김씨는 학교측이 내놓은 교육자적 자질 미흡 부분을 조목조목 깨부숴야 했다. 요즘 온라인에서 전개되는 학술단체나 제자들의 탄원이나 반박 같은 것도 재판 도중 차곡차곡 준비하고 제출됐으면 요긴했을 훌륭한 증거들이다.
재판은 원고가 청구한 쟁점을 놓고 원고·피고간 주장과 증거를 비교해 승패를 결정짓는 일종의 ‘로 게임(low game)’이다.
김씨가 주쟁점을 등한시한 채 재판상 다툼의 여지가 없는 학자적 양심만 부각시킨 것은 본인의 실수다. “사법 불신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것 같다”는 가족의 전언을 들으면 더욱 아쉬움이 든다. 김씨는 재판에서 깨끗이 졌다. 그런 그에게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동정론은 있을지언정 오심이 있었던 것처럼 몰고가는 여론은 잘못된 것이다.
김씨가 주쟁점을 등한시한 채 재판상 다툼의 여지가 없는 학자적 양심만 부각시킨 것은 본인의 실수다. “사법 불신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것 같다”는 가족의 전언을 들으면 더욱 아쉬움이 든다. 김씨는 재판에서 깨끗이 졌다. 그런 그에게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동정론은 있을지언정 오심이 있었던 것처럼 몰고가는 여론은 잘못된 것이다.
〈박래용 사회부차장 le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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