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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폼페이 최후의 날

우리 정치사에 또 하나의 진기록이 만들어졌다.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로 뽑힌 박원순은 소속당이 없는 무당파다. 흔하디 흔한 정치인도 아니요, 정당인도 아니다. 그런 그가 60년 역사의 제1 야당 후보와 일대일로 맞서 대통령 다음의 권력이라는 서울시장 선거의 후보가 됐다. 정당정치의 사망이라고까지 진단하는 것은 섣부르겠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영·호남 지역 기반에 안주하며 기득권 지키기로 일관해온 거대 양당 체제에 일대 위기가 닥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양당 독점체제 20여년 동안 나라가 결딴날 뻔한 위기를 몇 차례나 겪으며 정치적 무능에 진저리를 친 국민이 정치 불신→정치 혐오→정치 무관심 단계를 거쳐 결국 종주먹을 들이대리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민심을 먹고살며 정치를 업(業)으로 한다는 정치인들만 국민의 속이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고, 화병 걸리기 일보 직전이란 사실을 발밑의 땅이 쩍 갈라질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뉴스라운드업] 서울시장 보궐선거


2000년 전 폼페이 사람들은 유럽 대륙을 통틀어 유일한 활화산인 베수비오산을 끼고 살면서도 화산 연기를 보는둥 마는둥 희희낙락하다 하루 아침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기 79년 8월24일 새벽. 이탈리아 남부 휴양도시 폼페이를 덮친 화산재는 수시간도 안돼 거기 살던 사람들의 눈과 입과 코를 채워 버렸다.
폼페이는 4m 두께의 화산재 밑에 묻혔고, 직후에 내린 비로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집 안에 빙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보석을 움켜쥔 사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사람, 손을 내민 사람…. 화석처럼 굳어버린 폼페이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닥쳤는지 잘 모르는 모습 그대로 1400여년이 지난 뒤 발견됐다. 


 

기존의 정당, 기존의 정치인이 꼭 폼페이 귀족들 같다. 정치인과 특권세력들은 다른 세상을 사는 듯 화성인처럼 딴 길로 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대생 성희롱 발언을 한 동료 의원 제명안을 “누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며 큰소리 뻥뻥 치며 부결시키고, 핵심 수족들이 줄줄이 파렴치 비리로 잡혀들어가는 판에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염장 지르는 말을 할 리 없다. 정치사상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시민 후보’의 등장은 땅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화산 폭발의 시작일지 모른다. 참을 인(忍)자를 새기고 엎드려 있던 시민들이 “그래, 어디 돌 한번 맞아 봐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박원순 바람’은 아직 불지도 않은 ‘안철수 돌풍’의 전조(前兆)에 불과하다. 5% 지지율에 불과하던 박원순은 안철수의 지지와 양보를 받은 뒤 50%의 지지율로 치솟았다. 선거자금 펀드를 개설하자 52시간 만에 45억원이 들어왔다.
‘안철수 현상’의 원인을 놓고 많은 사람이 소통과 대화, 헌신, 청렴성을 말한다. 그러기에 같은 말을 해도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친서민이니 공생발전이니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도 국민이 시큰둥한 것은 그런 진정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IMF 환란을 겪은지 14년. 가까스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지만 성장의 과실은 가진 자들이 더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가 됐다. 제자리 소득에 물가는 10년 이래 가장 높이 올랐고 젊은이들은 어렵게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중소기업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노동시장에는 비정규직만 넘쳐난다. 바로 이 시기, 시민 후보는 정치의 무능과 국민의 좌절이 만난 곳에서 등장했다. 

그런데도 수십년 독점상의 권력을 누려온 기성 정치인은 아직 위기를 실감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폼페이의 사우나에 드러누운 귀족들처럼. 집권 여당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가 “철수가 나오니 다음엔 영희가 나오겠네”라고 이죽거리는 것을 보면 자성도 변화의 의지도 없어 보인다. 고사 상태에 있는 늙은 민주당도 허둥대는 꼴이 한가지다.
시민들이 바깥에 눈을 두고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현실은 이 놈의 집에 더 기대할 것도 없고,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얘기다. 안철수의 아바타인 박원순의 등장만으로도 정치권은 휘청거리고 있지만, 안철수는 아직 등판도 안한 상태다. 제2, 제3의 ‘안철수’는 얼마든지 더 나타날 수 있다. 서울시장에 시민 후보가 당선되면 수도 서울에서 사실상 ‘시민혁명’이 일어난 것과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화산이 무서운 이유는 쇄설류(碎屑流) 때문이다. 쇄설은 부술 쇄(碎), 가루 설(屑), 깨진 부스러기라는 뜻이다. 암석과 용암파편, 가스로 형성된 연기 기둥 속에 숨어 있다가 화산이 폭발하면 시속 200㎞ 속도로 해일처럼 산허리를 타고 쏟아져 내려온다. 섭씨 1000도가 넘는 쇄설류는 내려오면서 숲이나 마을 등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다. 지금 민심이란 화산에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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