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영화 <엠마누엘 부인>이 상영된 뒤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의 이국적 모습을 보겠다며 태국 방콕을 찾아왔다. 찰스 소브라즈는 자신의 펜션에 묵는 관광객들에게 독이 든 샴페인을 먹여 살해하고 돈과 귀중품을 훔쳤다. 1982년까지 그는 인도·네팔·홍콩 등을 돌며 12건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세계 20대 연쇄살인마 리스트에 올랐다. 수십 개의 신분증을 위조해 동남아 국경을 유유히 넘나든 이 연쇄살인범은 인터폴 공조를 통해 결국 붙잡혔다. 국제 해커조직으로 악명높은 ‘아나니머스’ 조직원 25명도 2012년 인터폴에 의해 검거됐다. 인터폴 주도로 유럽과 남미 경찰이 공조해 벌인 성과다.
21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제87차 인터폴 총회에서 김종양(57, 전 경기지방경찰청장) 인터폴 선임부총재가 총재로 당선됐다고 경찰청과 외교부가 밝혔다. 연합뉴스
인터폴은 전 세계 경찰력을 연결해 범죄인을 공동으로 붙잡기 위해 맺어진 기구다. 경찰의 유엔이다. 유엔(193개국)보다 많은 194개국이 가입해 있다. 가맹국은 모두 자국 내에 정보교환사무소를 두고 있고, 프랑스 리옹에 있는 사무총국과 연결돼 있다. 해외도피사범이 발생하면 이 네트워크를 통해 입국 가능성이 높은 나라에 수배사실이 통보된다. 통보받은 나라의 경찰은 수배자를 찾아 체포한 뒤 해당국에 알려주고 신병을 인도하는 것이다. ‘적색 수배(Red Notice)’는 살인·강도·강간, 5억원 이상 경제범 등에 내려지는 최고등급의 수배령이다. 적색수배령이 내려지면 전 세계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어진다. 5조원대 사기꾼 조희팔의 오른팔인 강태용씨,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적색수배를 통해 국내 송환된 사례다. 인터폴 사무총국은 계엄문건 작성 지시 혐의를 받고 있는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도 적색수배 검토 중이다. 지난해 인터폴 공조를 통해 국내로 송환한 해외도피사범은 300명에 이른다.
인터폴 총재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 경기경찰청장 출신의 김종양 부총재가 선출됐다. 러시아 출신 부총재가 경쟁후보로 나섰으나 미국 등 반(反)러시아파의 지원이 당선에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외신들은 “서방국의 승리”라고 전했다. 전임자였던 중국의 멍훙웨이 전 총재는 지난 9월 중국에 간 뒤 연락이 끊겼다가 이후 뇌물수수혐의로 조사받는 것으로 확인돼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인터폴의 활약상만큼이나 수장의 진퇴를 둘러싼 막전막후도 극적이다.
<박래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