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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들/아침을 열며

[아침을 열며] 풀뿌리, 피자똥, 바벨탑

지방선거에 출마한 모 후보가 선거 한달 전에 종적을 감췄다. 후보 등록과 그 뒤 선거운동은 가족들이 대신했다. 선거운동 2주일 동안 단 한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후보는 무난히 당선됐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행방을 감춘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지역 주민들은 ‘사망자’에게 표를 찍은 셈이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때 부산의 구의원 선거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패·비리 얼룩 지방자치제-

가히 ‘백골(白骨) 당선’이라 할 만하다. 죽은 사람도 당선시키는 신기는 정당 공천에 힘입은 바 크다. 후보보다 기호 몇번이냐가 붓두껍의 행로를 좌우한 것이다.
이쯤되면 유권자의 60%가 자기 동네 구청장 후보를 ‘잘 모른다’고 답한 여론조사결과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시의원 및 구의원 후보들은 70%가 ‘모른다’고 했다.

후보 입장에선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막대기를 꽂아 놓아도 당선은 따논 당상이라는 지역당의 위력을 믿기 때문이다.

엊그제 4·25 재·보선에서도 중앙의 정치인들은 그럴 줄 알았을 것이다. ‘막대기 당선’ 전통에 유력 대선주자들이 몇번 휘젓고 다니면 유권자들은 그저 따라올 줄 여겼을 것이다.
민심은 그래서 무섭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결과는 어김없이 정곡을 짚는다. 집권당이든 야당이든 예외가 없다. 번번이 경험하면서도 먼저 까먹는 쪽은 항상 정치한다는 작자들이다. 언필칭 중앙 정치인들은 지방자치 12년 동안 그렇게 지방행정과 의정을 쥐락펴락해왔고, 아직도 끈을 놓지 않고 있다.

2006년 민선 4기 지자제부터 기초의원(시·군·구의회)까지 정당추천제를 도입한 것은 중앙의 위세를 끝없이 펼쳐 보려는 과욕이었다. 공천권자에 매달리고 피튀기는 봉투 경쟁을 벌일 것은 뻔한 이치였다.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면 바보다. 그래서 이번 재·보선 과정에서 터져 나온 ‘돈 공천’이 빙산의 일각일 것이란 한숨은 당연하다.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지방자치의 현 주소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다. 지방선거가 끝난지 1년이 채 안된 시기 선거법 위반혐의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거나 사직한 광역·기초단체장은 모두 23명. 광역·기초의원들을 합하면 50명이 넘는다.
지금까지 기소된 수가 426명이니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배지가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견제와 감시 기능을 상실한 지방자치의 참상은 그 이상이다. 지방의 한 간부 공무원은 “피잣집 사장 출신 구의회 의장에게 잘 보이려 사무실마다 수십판씩 피자를 시켜 먹고, 남은 것은 나눠 집에 들고 간다”고 했다. 연일 ‘피자똥’을 싼다는 그의 푸념은 오히려 낭만적이다.

-정당공천 폐지등 검토해야-

지방의원이 국회의원의 지역조직책으로 전락한지는 이미 오래이고, 지자체장의 정실인사나 엽관인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민선 지자체장이 한 업적 두가지는 청사 짓기와 축제 개최”라는 비아냥은 과장이 아니다. 가뜩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들이 한해 예산의 50~60%씩을 털어넣어 ‘바벨탑’식 호화청사 쌓기를 해도 말릴 사람이 없다. 지방세수로 자체 공무원 인건비도 대지 못할 정도로 재정이 열악한 지자체장들이 앞다퉈 전용차를 대형차로 바꾸는 데 지방의회는 흔쾌히 동의해줬다. 지자제 실시 이전인 1994년 287개였던 지방축제는 1176개로 4배 이상 늘어났다. 대부분 자치단체장 치적을 위해 급조된 동네 잔치다.

민선 지자체 시대가 95년 시작됐으니 ‘지방에 의한, 지방을 위한’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때도 됐다. 하지만 실정은 딴판이다. 거의 모든 지자체에서 단체장과 의회를 한 정당이 독식한 상태에서 지방정부의 선진적·효율적 운영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밖에 없다.

지방토호세력 연합의 지방행정 농단은 이제 공론화할 때가 됐다. 이지러진 지방자치를 손 볼 때도 됐다. 지방정부 고급 공무원, 지방업체 사주, 지방 언론의 소연정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처절하게 유린하고 ‘그들만의 세상’에 철주를 박는 현실을 언제까지 모른 체 할 순 없지 않는가.

정당대결로 변질된 지방선거를 지역의 참 일꾼을 뽑는 후보자간 인물대결로 되살려놓아야 한다.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 폐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길 바란다. 권역별 거점도시 중심의 지방행정구역 개편도 방안 중 하나다. 더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박래용 전국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