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지도부가 아침 회의에서 돌아가며 한마디씩 현안을 짚는 것은 사실 사전에 조율된 발언이다. 비주류야 내키는 대로 물정 모르는 소리를 쏟아내지만, 주류인 대표나 원내대표, 원내수석부대표쯤 되면 ‘오늘의 아젠다’를 내놓는 게 관행이다. 메모지를 손에 들고 줄줄 읽는 사람도 있고, 아침 신문 같은 소품을 들고 흔드는 사람도 있다. 오전에 청와대와 여당 핵심 인사들의 얘기를 전하는 일선 기자들의 보고를 받아보면 ‘아하, 오늘 여권은 무엇을 이슈화하려는구나’라는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
이런 요점 정리는 대체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내려보낸 것이다. 과거 정부에선 국가정보원에서 만들어 준 것을 참고했다. 오래된 얘기지만 이 분야에서 김영광을 따라갈 자가 없다는 것이 그쪽 업계의 얘기다. 김영광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이었다. 판단기획국은 국내 정보를 몇 장짜리 보고서로 압축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김영광 보고서’를 상당히 신뢰했다고 한다. 정치공작의 시(始)와 종(終)은 판단기획국장 펜대에 좌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국가정보원의 행태가 그짝이다. 그 옛날 중정으로의 회귀다. 박근혜 정부 6개월 동안 정국을 쥐락펴락하는 사건의 중심엔 항상 국정원이 있었다. 육사 25기 출신 남재준 원장은 거침이 없다. 그 뒤에는 ‘부통령’이라 불리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다. 1974년부터 중정 대공수사국장으로 5년간 롱런하며 유신 중후반 정보부의 대공수사를 총지휘했던 그다. 그에겐 타협하고 양보하는 원탁 테이블보다 정권에 반대하는 언동을 차단하고, 탄압했던 남산의 중정 지하실이 더 익숙할 것이다.
김기춘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장 수여 (출처 :경향DB)
언론인·장관·국회의원을 거치며 여러 정권의 권부를 들여다본 노(老)정객 남재희 전 장관의 얘기다.
“‘육법당’(육사·서울대 법대)이라는 말이 생긴 게 전두환 정권 때 일이다. 군인과 검찰이 다 해먹었다는 얘긴데, 이런 육법당의 재판이 될까 우려된다. 현재 정권의 인적 배치는 이미 공안정국에 가까이 와 있다. 정권 핵심부는 김기춘 비서실장부터 시작해 공안 라인이 꽉 잡고 있는데, 여기서 더 나가면 공안정국으로 간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점을 고민해야 한다.”(프레시안 인터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정보기관이 다시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나라를 좌지우지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2008년 바뀐 국정원의 새 원훈(院訓)은 산산이 깨진 지 오래다. 대선에 개입하고, 자기네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까발리고, 3년 묵혔던 내란음모 사건을 들고 나와 현란한 언론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무명의 헌신’은 ‘진격의 국정원’으로 바뀌었다.
난데없는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도 공작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게 그 바닥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의 얘기다. 수개월 전부터 서울 서초동 대검 청사 앞에서 매일 극우단체들이 “종북 총장 채동욱 물러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판이다. 낯익은 관제 시위다. 검찰에선 두 달 가까이 채동욱 총장의 일거수일투족이 미행당해 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TK(대구·경북) 출신 검찰 원로들이 숙의끝에 채동욱을 내치는 것으로 정리했다는 설도 있다. 모두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만 ‘일련의 흐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차에 오르는 채동욱 검찰총장 (출처 : 경향DB)
검찰총장이 정권의 눈엣가시가 된 것은 할 일을 안 해서가 아니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정권으로서는 원세훈·김용판 기소는 만악(萬惡)의 근원이다. 야당의 장외투쟁과 시민들의 촛불집회, 이 모든 우환은 검찰이 동력을 제공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 여권의 인식이다. 한마디로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수사결과는 차치하고라도, 재판에서 국정원 활동을 ‘신매카시즘’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기소 이후에 국정원의 숨겨진 계정을 찾는 데 전력 수사만 하지 않았어도 검찰총장이 이렇게 험한 꼴은 안 당했을 것이다.
대학이 외부인사의 강연을 거부하고, 극장이 영화 상영을 중지하고, 역사 교과서가 다 뜯어 헤쳐지는 마당이다. 군사독재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 20년.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기에 이렇게 어이없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됐을까. 온라인에는 살다살다 검찰 편을 들게 될 줄 몰랐다는 시민들의 반응이 한가득이다.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인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기 고백을 하고, 십자가를 밟아야 살 수 있는 세상이 닥칠지 모른다. 국정원은 그럴 힘을 갖고 있다. 국정원의 힘은 정보다. 그 정보의 소비자는 단 한 명, 대통령뿐이다. 국정원의 일탈과 오버는 전적으로 대통령 책임이다.
어지럽다. 놀랍다. 자고 일어나보니 과거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다. 1970년대 유신시대 풍경의 데자뷰(旣視感·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 21세기 디지털 국민을 대하는 정보정치의 현장이다. 이게 박근혜 정부의 창조인가.
박래용 정치에디터·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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