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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에서

“장발장이 무슨 죄인가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인기다. 젊은 시절부터 사회고발 소설을 구상했던 빅토르 위고는 꼬박 16년을 매달려 작품을 탈고했다. 위고가 그려낸 1830년대 프랑스는 현실속 지옥이요, 소설에 등장한 수많은 군상은 사회적 약자이다. 한국에서는 1918년 우보(牛步) 민태원이 매일신보에 <애사(哀史)>란 제목으로 처음 연재했다.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지만 소설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한 독자는 연재 한 달 뒤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왔다. 



“장팔찬은 무슨 죄인가요. 배고파 우는 생질들을 보다 못해 면보(빵) 한 조각을 훔친 죄가 무엇이 그리 크오리까. 만일 장팔찬이 나는 길로 비단보에 싸이며 입에다 은술을 물게 되었던들 그러한 죄명을 쓰고 그러한 고생을 하였을 리가 없습니다.”(매일신보, 1918년 8월16일자)




식민치하 조선인에게 장발장은 “우리처럼 박해받는 사람의 이야기”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일제의 토지조사령 발동 이후 전 토지의 40%를 빼앗겼던 시대이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경작권과 소유권 등 토지에 관한 모든 권리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했다. 일본이 자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빼앗아간 쌀은 1917년 9%에서 1925년 35%로 격증했다. 조선인 한 사람이 먹는 쌀 소비량은 일본인의 절반도 안됐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핍박받던 시절, 먼 나라 불란서 공화주의자들의 궐기는 식민지 민중의 가슴을 두드렸던 것 같다. 누군가 도화선에 불만 댕겼다면 조선대혁명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일제 때 열광했던 <레미제라블>이 100년이 지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현실에서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통해 위안을 찾는다는 분석이지만, 설마 우리 현실이 그때 프랑스의 절망과 동격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찡한 구석은 있다. ‘바리케이드 저 편 어딘가엔 그리던 낙원이 있을까. 내일이면 새 날이 밝아오네….’ 민중의 노래에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도 하나씩 둘씩 마음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DB)



개인의 삶에 멍울이 들면 사회도 병들게 마련이다. 우리 중산층 비율은 1997년 75%까지 높아졌다가 외환위기 이후 64%로 내려앉았다. 같은 기간 빈곤층은 7.7%에서 12.5%로 늘어났다. 매년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젊은 세대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최소 4%대 성장이 필요하다는데, 성장률은 3%대로 주저앉았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이고, 자살률은 세계 1위다. 20대 여성의 66%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고통스러운 세상에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를 낳기 싫다고 말한다.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최근 5년간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절대빈곤을 경험하고 있다. 



절박한 현실은 숫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월 15만원 노령연금으로 살아온 60대 부부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그토록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부모가 생때같은 자식을 안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병든 노부모가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가족이란 방패막이조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두 빈곤했던 시절에 나의 가난이나 힘든 노동은 한탄거리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고생하더라도 거기서 보상을 얻고, 거기서 보람을 찾는 게 자랑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부자와 빈자가 극으로 벌어지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들 한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한 ‘비참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이웃과 다를 바 없다.



그동안 온갖 진단과 분석이 쏟아졌다. 처방은 말뿐 사회는 증오와 대립, 갈등이 더 커졌으면 커졌지 줄지는 않은 것 같다. 국가 경제의 덩치는 커졌지만 개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기득권층은 스스로 만들어낸 암흑에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사랑과 자비가 사라진 자리에 상실과 분노가 들어오면 반동(反動)이 팽창하고 끝내 폭발한다는 사실은 그간의 역사가 보여준다. 양극화는 이제 단순한 빈부격차를 넘어 ‘상호 손해’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없는 자들은 공격적이 되고, 가진 자들은 심리적 부담을 느껴 서로 손해가 되는 구조다. 



새해 새 아침 좋은 얘기를 하고 싶다. 어느 대통령도 국민이 못되라고 정치를 펼치지는 않을 것이다. 위고는 서문에 ‘지상에 무지와 가난이 존재하는 한, 이 책은 무용지물일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박근혜 당선인은 어머니같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아이가 밥을 먹으면 어미는 절로 웃는다. 박 당선인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수백년 전 이국의 고전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이 영화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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