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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에서

野 단일화, 가을야구 닮았다…야구는 룰은 있지


2007년 12월11일 밤 정동영과 문국현이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만나 후보 단일화 담판을 벌였다. 대선을 8일 남겨놓고서다. 자리를 주선한 함세웅 신부는 “좋은 결론이 날 때까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겠다”고 했다. 5년 전인 2002년에는 노무현과 정몽준이 산통 끝에 단일화를 이뤘다가 대선 전날 파투(破鬪)가 났다. 그 5년 전인 1997년에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있었고, 1987년에는 양김(兩金) 단일화 협상이 있었다. 5년마다 정치권은 계절병처럼 단일화 열병을 앓는다. 몸이 더 단 쪽은 항상 국외자(局外者)들이다. 종교인과 예술인, 교수와 시민단체 원로들이 서먹해하는 후보들을 끌고 떠밀어 합방시킨다. 



한국 정치 지형에서 보수는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비교적 탄탄하게 결집돼 있다. 진보는 큰집, 작은집, 거기서 튕겨져 나온 셋째네 등으로 뿔뿔이 나뉘어 있다. 지난 4월 총선 때 범야권 진영의 득표율은 48.8%. 야권 지지율을 박박 긁어 다 합쳐야 보수 후보를 당할 둥 말 둥이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57만표(2.4%), 김대중 39만표(1.6%) 차이의 신승(辛勝)이 야권의 현실을 말해준다. 선거 때마다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나란히 구호 외치는 문재인, 안철수 대선 후보 (경향신문DB)


 이번 대선도 어김없이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고 있다. 당 경선에 단일화를 거쳐 대선에 진출하는 과정이 흡사 3-4위전과 2-3위전을 거쳐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는 가을 야구와 같다. 야구는 130년 전통의 룰이라도 있다. 단일화 경선 룰은 할 때마다 달라진다. 여론조사를 통해 뭘 나눠 갖기로 한다면 아마 부부나 부모 자식 간에도 낯 붉히는 일이 생길 것이다. 권력이 거의 손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자신에게 유리한 구도로 룰을 짜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적합도니 경쟁력이니 티격태격, 수싸움과 날 선 공방이 오갈 수밖에 없다. 그를 지켜보는 마음은 항상 불편하다.



여론조사는 어디에 중점을 두고 어떤 표현으로 설문을 만드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같은 시간에, 똑같은 설문으로 물어도 조사기관에 따라 들쭉날쭉 결과가 나오는 것이 여론조사다. 중앙선관위 선거보도심의위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할 때 오차범위 내에서 격차가 나올 때는 우열을 언급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그런 표현을 쓰는 언론사엔 가차없이 주의 공문을 보낸다. 오차범위가 ±2.5%일 때 두 사람 간의 격차가 5% 이내라면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 통계학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론조사 결과 0.1% 차가 나더라도 승자를 가린다는 방식은 제비뽑기나 가위바위보를 통해 대선 후보를 정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정당정치를 훼손하는 사례로 가히 해외토픽감이다. 



어젯밤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의 심야 TV토론이 있었다. 후보 등록 데드라인을 코앞에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맞짱토론이었다. 단 한번의 프레젠테이션만으로 나라의 운명을 맡길 후보를 고르라니 유권자 서비스는 빵점이다. 두 후보의 연대는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야당 지지자의 기대에는 부응했을지 몰라도 정당 민주주의의 근본은 무시했다. 거기엔 당원도, 국민도 직접 선택권이 빠져 있다. 



요즘 여기저기서 제안하는 대선 결선투표제는 이런 단일화 폐해의 대안으로 곱씹어볼 만하다. 결선투표제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상위 1, 2위만을 대상으로 2차 투표를 실시해 50% 지지를 넘는 당선자를 뽑는 제도다. 결선투표제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최종 당선자에게 투표자 과반수의 대표성을 부여함으로써 안정적 리더십을 확보해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투표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사표(死票) 방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올 4월 열린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선 10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결과는 사회당(프랑수아 올랑드) 28.6%, 민주운동(니콜라 사르코지) 27.1%, 국민전선 17.9%, 좌파전선 11.1%였고, 10% 이하를 득표한 후보가 6명이었다. 2주일 뒤 열린 상위 두 사람 간의 결선투표에선 올랑드 51.6%, 사르코지 48.3%로 올랑드가 승리했다. 



결선투표제는 특히 진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경우 통합진보당 이정희·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목소리도 배제되지 않고, 이들이 완주하더라도 야권 표를 갉아먹는 ‘이적 행위’를 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선투표제도 시간·비용 등 단점이 만만치 않다. 더 큰 문제는 제도보다 제1야당의 무능한 경쟁력이다. 정당이 찌질하니 제3 후보가 등장한 것이다. 실력을 키우고 몸집을 늘려 보수 세력과 당당히 일대일 균형을 맞추지 못한 잘못은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대선 때마다 후보 단일화를 모든 가치의 우위에 놓고 매달리는 것은 보기에 안타깝다. 단일화만 되면 이긴다고 믿고 선거의 전부인 양 끌고 가는 것도 부끄럽다. 단일화 2주를 지켜보니, 5년 뒤에 또 단일화 안갯속을 헤매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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