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판의 규율은 일반 사회보다 훨씬 엄격하다. 직접 처벌주의다. 손장난을 하다 걸리면 손목이 잘리는 식이다. 영화 <타짜>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전국 화투판의 1인자(아귀)가 주인공 청년(고니)과 승부를 벌일 때, 갑자기 손목을 움켜잡는다. 밑장빼기로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대응이 이 못지않다. 문제의 화투장을 유리컵 안에 집어넣고 역제안을 한다. 좋다, 까보자. 네 말이 맞는지 아닌지. 대신 틀리면 네 손목도 걸어라. 유리컵 안의 패가 공개되고 진실은 금방 가려진다. 상호 동의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합의적 입증이다. 섰다판의 세계이지만 공정하고 깔끔하다.
영화 '타짜' 의 한장면 (출처: 경향DB)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느니 안 했느니를 놓고 3주째 옥신각신이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국감 발언으로 촉발된 논란에는 박근혜 후보, 이명박 대통령까지 가세했다. 새누리당은 아침부터 밤까지 NLL 공세다. 이에 맞서는 문재인 후보도 만만치 않다. 그는 “정 의원 발언이 사실이라면 내가 책임지겠다. 사실이 아니라면 정 의원과 박근혜 후보가 책임져라. 이것만 약속하면 대화록 공개와 열람에 동의하겠다”고 했다. 내 손목을 걸 테니 네 손목도 걸라는 얘기다.
해법은 간단하다. 회담록을 확인하면 끝날 일이다. 법적인 제약이 있지만 합의적 입증의 길은 있다. 회담록을 국정원이 갖고 있다면 국회 정보위가 요구해 여야가 함께 열람하는 방법이 있다.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돼 있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열람할 수 있다.
패를 까보면 쉽게 해결될 문제다. 한데도 딴전이다. 섰다판의 도박꾼들도 웃을 일이다. 애초 던지고 끼얹어 불길만 훨훨 타오르게 하면 된다는 캠프 파이어가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의 여당과 친여 보수언론 사이의 던지고 받기식 협업체제도 작동됐다. 친여 언론이 정체불명 관계자의 입을 빌려 보도하면 여당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세를 펼치고, 다시 이를 대서특필하는 순환이다. 2013년 체제를 뽑자는 대선은 2008년에 종료한 전전 정부의 잘잘못을 가려보자는 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노무현 때리기’는 그가 죽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대통합을 외치며 봉하마을을 찾았던 게 무색하다.
군불은 한 달 전부터 때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난달 이 대통령은 돌연 안보장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론은 북한 어선의 NLL 침범에 강력 대응한다는 것이다. 북한 어선들의 월선은 항다반사로 있는 일인데 대통령이 이런 일로 긴급안보회의를 소집하나 싶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꽃게잡이철에 북한 어선들이 넘어오는 건 해마다 반복되는 일인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그 며칠 전에는 우리 해군이 연평도 서남쪽을 넘어온 어선들을 향해 경고사격을 했다. 고기 잡는 비무장 어부들에게 총과 포탄을 쐈으니 좀 심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미심쩍은 삽화들은 NLL에 이목을 끌기 위한 일련의 예열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하이라이트는 대통령이다. 이 대통령은 육군 22사단 ‘노크 탈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전방이 아닌, 연평도로 달려가 “22사단 생각하다가 여기 오니까 마음이 든든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 군은 통일이 될 때까지 NLL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뚫린 곳은 동부전선 철책선인데 군 통수권자는 서해에 가서 바다 잘 지키라니 참 이해못할 이벤트다. 북풍이 불지 않으니 남풍이라도 일으키고 싶었던 걸까.
NLL문제 제기하는 새누리당 (출처: 경향DB)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NLL은 1953년 정전협상 당시 경계가 확정된 육상과 달리 바다 위에는 어떤 경계선도 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어선의 보호를 위해, 또 해군 함정이 북측 가까이 못 가게 하기 위해 우리가 공해상에 그어놓은 선”(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이양호 국방장관)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서해5도를 포함시키는 북한판 남방한계선을 선포했다. 서로 주장하는 경계선이 다르니 시비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1999년 이후 남북 정규군 간에 벌어진 우발적 교전만도 네 차례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주변 해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정해 남북 양측이 고기잡이라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하자는 평화수역 해법을 제시했다. 이 협의는 현재 중단된 상태다. 남북 어선이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서해 황금어장에선 어제도 오늘도 중국 배 수백, 수천 척이 몰려와 싹쓸이를 해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이런 서해 사정을 개탄하며 NLL 문제를 공론화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나라만 시끄러웠지, 뭐 하나 달라진 것도 없다. 그것을 몇 년이 지난 이제 끄집어내 죽은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정상회담 기록을 공개하는 건 외교의 기본이 아니라는 점잖은 충고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까보자는 것이다. <타짜>에서 주인공이 손목을 걸고 진실을 가리자며 한 얘기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천하의 아귀가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후달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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