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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들/여적

[여적] 동네 이름

2004년 3월4일부터 이틀간 충북 충주시 살미면 설운동(雪云洞)에 때아닌 눈이 내려 21㎝의 적설량을 기록했다. 보기 드문 춘삼월 폭설이다.
같은 날 경북 봉화군 상운면 설매리(雪梅里)에도 25㎝의 폭설이 내렸다. 지명에 물 수(水)가 들어간 경기 파주시 문산읍(汶山邑)은 해마다 물폭탄이 쏟아지는 상습 홍수 지역이다. 1996, 98, 99년 여름 호우 때는 전국 피해액 중 이곳에서만 전체의 10%가 넘는 피해를 기록했을 정도다. 구리시 수택동(水澤洞)은 2001년 7월 집중 호우 당시 이름 그대로 동네가 연못처럼 변해 시 전체 피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소방방재청 산하 국립방재연구소가 지명이 자연재해와 일정 부분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는 보도다. 1912~1918년에 불렸던 옛 지명 3989곳을 분석한 결과 눈(雪)이 들어간 곳에는 실제로 눈 피해가 잦았고, 물(水)이 들어간 곳은 홍수 발생 빈도가 월등히 높았다는 것이다.
눈 지명은 경기·강원에 밀집돼 있다. 폭우를 의미하는 홍(洪)이 들어간 지역은 전국에 69곳으로 해마다 물난리를 적지 않이 겪는 재해지역으로 분류됐다. 


 

바람 풍(風)이 들어간 곳은 대부분 태풍의 주요 경로에 위치해 있었으며, 마를 건(乾)이 포함된 지역은 가뭄이 빈발해 농업에 고통을 겪는 일이 많았다고 하니 지명 하나하나가 결코 허투루 지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 통계로 입증된 셈이다.
선인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를 후대의 ‘슈퍼 컴퓨터’가 뒤쫓아간 식이니 탄복을 금할 수 없다. 소방방재청은 이런 자료를 토대로 이름에 안개가 들어있는 경남 고성군 마안개 같은 곳에는 교통시설에 안개등을 추가 설치하는 등 지역별 특성에 맞춰 재해예방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하니 자못 성과가 주목된다.

지명은 풍토적 특성뿐 아니라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문화, 민속 등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온(溫)·정(井)·천(川)이나 물이 펄펄 끓는 의미의 가마솥 부(釜)가 들어간 지역에 유독 온천이 많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요즘엔 큰 고개(大峙)란 뜻을 담고 있는 서울 강남 대치동이 입시라는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이 몰리는 학원가로 변모한 것을 보면 지명 속에 풍수지리도 담겨 있다는 얘기가 아주 빈말도 아닌 것 같다.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는 동네 이름은 지역의 풍습과 특성을 말해주는 살아있는 증인이자 땅에 새겨진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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