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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들/여적

[여적] ‘용전(用錢)의 효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워셔가의 한 호텔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주려고 다가오던 벨보이가 갑자기 뒤에 도착한 고급 리무진으로 달려갔다.
차에서는 체구가 작은 동양인이 내렸다. 벨보이가 그 동양인을 호텔 안쪽으로 안내하는데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예우가 극진했다. 그가 바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다. 벨보이에게 주는 팁은 보통 1~2달러 정도다. 정 회장은 호텔 투숙 첫날 벨보이에게 1000달러를 찔러 주었다고 한다. 벨보이가 LA 시장 차를 팽개치고 정 회장 쪽으로 달려간 이유요, 정 회장의 돈 쓰는 기술이다. 


 

1997년 ‘한보 사태’의 주역인 정 회장은 정·관계 인사들에게 100억원이 넘는 돈을 뿌렸다. 그의 로비 액수는 ‘0이 하나 더 붙는다’는 말로 대표된다. 그에게 돈을 받은 인사들은 밥을 먹거나, 악수를 하거나,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집에 가서 보면 양복 주머니에 돈봉투가 들어 있더라고 했다. 지금은 고전이 됐지만 사과 박스에 돈을 넣어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주는 ‘신기술’도 그가 처음 개발한 것이다.
“빳빳한 새 돈으로 사과 박스에 1만원권 지폐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의 뇌물론이다. 돈은 준 만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후 사과 박스는 골프가방과 굴비·케이크 상자 등으로, 1만원권은 달러나 양도성 예금증서·상품권 등 경박단소(輕薄短小)형으로 끝없이 진화하고 있다.

엊그제 한명숙 전 총리 공판에서 ‘용전(用錢)의 효과’라는 말이 나왔다. 법률이나 경제용어가 아니라 재계에서 은어처럼 쓰이는 표현이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은 “‘용전의 효과’는 사기업에서 쓰는 말인데 돈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 돈이 적은지 많은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라며 “10만달러를 원하는 사람에게 5만달러는 적고, 1만달러를 원하는 사람에게 5만달러를 주면 부담스러워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은 상대방이 실망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적정한 선에서 주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다. 로비스트들에게는 ‘용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첫째 기다리기 전에 간다, 둘째 직접 만나 준다, 셋째 기대 이상의 액수를 넣는다는 등의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실제 돈봉투를 놓고 갔는지는 한창 공방이 진행 중이므로 곽씨 발언의 진실성 여부를 따질 계제는 아니다. 다만 뒤에서 음습하게 주고받던 뇌물이 갈수록 이론을 가다듬고 기술을 발전시켜 이제는 학술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데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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