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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들/여적

[여적] 한강 인도교 진혼제

“공병감,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다.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

6·25 전쟁 발발 사흘 뒤인 1950년 6월28일 오전 2시30분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 인도교 폭파를 지시했다. 다리에는 남쪽으로 무작정 떠나려는 피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공병감은 “지금 사람이 많이 오는데요”라며 주저했으나 총참모장은 “즉시 시행해”라고 명령했다.
30분 뒤 ‘꽝’하는 폭음과 함께 인도교 교각 6개 중 2, 3번 교각이 폭파됐다. 총연장 1005m의 한강 다리가 두동강 났다. 당시 한강 주변에 있던 4000여명의 피란민 가운데 다리를 건너던 500~800여명의 시민들이 물속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국군은 당초 북한군 탱크의 서울 시내 진입 2시간 후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경인선 철교를 동시 폭파한다는 계획이었다. 전황상으로는 당일 오후 4시쯤으로 예측됐다. 폭파가 앞당겨진 이유는 미아리에 정찰 목적으로 먼저 나타난 북한군 탱크 2대를 보고 군 지휘부가 성급한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대전으로 달아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사수’ 녹음 방송을 내보내며 국민을 기만했다. 피란길을 잃은 150만 서울시민과 퇴로를 차단당한 4만여 장병들은 이후 북한군 치하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결정의 모든 책임은 현장에서 명령을 수행한 공병감 한 사람에게 씌워졌고, 그는 총살형에 처해졌다. 14년 뒤 가족들의 청구로 열린 재심에서 군 재판부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따른 행위”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때 한강 인도교 폭파로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가 한강대교 주변에서 열린다는 소식이다. 진혼제는 영정 대신 폭파된 한강 다리 사진을 놓고 진행된다고 한다. 희생자가 누구인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가족이 한꺼번에 몰사한 바람에 지금까지 군과 정부 어디에도 신고 사례 한 건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원혼(怨魂)이다. 예비검속, 보도연맹 등 이런 억울한 떼죽음이 한두 건이 아니다. 

거의 모든 전쟁의 특징은 전투원보다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항상 비극적인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는 100만명이 넘는다. 걸핏하면 대북 응징을 주장하며 전쟁불사론을 외치는 세력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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